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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시청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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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우첸키우스키구 흐레샤티크로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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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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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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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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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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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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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2,18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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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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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5.0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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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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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억(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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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G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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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3(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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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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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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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리 클리츠코
(재선) |
1. 개요
2. 명칭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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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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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иїв (Kyjiv, 키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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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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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и́ев (Kiyev, 키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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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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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jów (키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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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표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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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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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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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문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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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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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
키이우 정착 초기 시절흑해로 연결되는 드니프로 강 양 어귀에 세워졌다.
본래 유목민이던 스키타이족이 정착해 살던 지역으로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로, '루스 도시들의 어머니'라고도 불린다.
키예프 공국의 수도였으며, 드니프로 강을 이용, 흑해와 발트해를 연결한 무역으로 번창하였다.
11세기에는 인구가 4만 5천여 명에 달했으며, 전성기였던 12세기 초에는 10만여 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멸망하기 전까지 당시 동슬라브 지역에 있었던 수많은 공국들의 형식적인 수장 노릇을 했고, 류리크 가문이 갈라져 공국들이 분열하기 전까지 주도권을 행사했다.
몽골 제국 침공 시절이렇게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키예프 공국이었지만, 13세기 초엔 루스 공국들 간 전쟁으로 수차례 점령되고 약탈당했다.
그나마 명맥은 유지했으나 1240년에 몽골 제국에 침공받아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로 변했다.
결국 이 일로 북쪽의 노브고로드 공국과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에 주도권을 내주었고, 이후 블라디미르-수즈달에서 갈라져나온 모스크바 대공국이 키이우 계열 공국들을 완전히 정리하면서 동슬라브 지역의 역사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중심으로 흘러갔다.
14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킵차크 칸국의 지배로부터 키이우 일대를 해방시킨 이후로 15세기까지 리투아니아의 영토였으나 타타르족이 계속 침략하여 회복이 늦어졌다.
16세기 루블린 조약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연방 국가로 합쳐지는 와중에 키이우는 폴란드 왕국의 도시가 되었다.
코사크들이 우크라이나를 크림 타타르족으로 방어하기 시작하자 키이우 시의 인구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키이우 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요새 도시 중 하나에 불과했으나 코사크 헤트만 페트로 사하이다니치의 지도하에 다시금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키이우는 인쇄소를 적극 운영하고 성직자들의 부패를 일소하며 기강을 세워 우크라이나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코사크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봉기한 이후(대홍수 문서 참조) 키이우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19세기 말에는 러시아 산업혁명의 한 중심지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1934년에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수도를 하르키우에서 키이우로 옮겼다.
이 기간 중에 인구가 급속도로 팽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시절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으나 전후 빠르게 복구하여 소련 제3의 대도시가 되었다.
녹지가 많아서 소련에서 가장 푸른 도시라는 명성도 가지고 있었다.
후에 소련에서는 1982년 키예프 1500주년 기념 메달을 만들었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현장이 키이우에서 불과 100 km 떨어진 곳이었다.
키이우는 체르노빌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로 한국으로 따지면 서울-천안 정도의 거리에 불과하다.
체르노빌 폭발 사고 당시 2차 증기 폭발로 원전 바닥이 완전히 녹아버릴 위험성이 제기되었다.
그렇게 되면 키이우의 상수원인 드니프로 강은 그대로 방사능 오염이 되기 때문에 도시 전체를 고스란히 버려야 하는데, 당시 체르노빌 발전소 사고 현장에서 3명이 지하로 내려가 배수 밸브를 개장하는 영웅적인 행동으로 성공한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운 좋게도 사고 이후 바람이 며칠간 거의 줄기차게 남풍이 불었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치고는 방사능 낙진의 피해가 최소화되었다.
당시 사고로 인한 방사능 피폭 피해를 소련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정부가 완전히 은폐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사고 며칠 후 키이우 축제가 있었는데, 당시 우크라이나 당국은 축제를 취소하기는커녕 강행하여 축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방사능에 많이 피폭되었고, 1986년 키이우 5월 축제와 관련된 모든 사진 기록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가 완전 말소했다고 한다.
1991년 소련 연방 유지 투표에서는 투표에 참가한 소련 9개 공화국의 대도시들 중에 유일하게 반대표가 다수였다(44%). 현재 키이우는 서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와 함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친서방 성향이 가장 강한 도시인데, 이미 이때부터 조짐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8월 소련이 해체되고 각 공화국이 독립함에 따라 키이우는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수도가 되었다.
유로마이단 사진2013년 말부터 2014년 초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대규모 친서방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친러 정권을 전복시킨 유로마이단이 일어났다.
수도 키이우에서 출발하는 피난 행렬 영상공습에 대응하는 키이우의 우크라이나군 방공 시스템2022년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에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2월 24일부터 북쪽의 벨라루스에서 빠르게 밀고 내려온 러시아군을 막기 위한 최전방 전투 지역이 되었다.
키이우 전투 문서 참조.다.
본래 유목민이던 스키타이족이 정착해 살던 지역으로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로, '루스 도시들의 어머니'라고도 불린다.
키예프 공국의 수도였으며, 드니프로 강을 이용, 흑해와 발트해를 연결한 무역으로 번창하였다.
11세기에는 인구가 4만 5천여 명에 달했으며, 전성기였던 12세기 초에는 10만여 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멸망하기 전까지 당시 동슬라브 지역에 있었던 수많은 공국들의 형식적인 수장 노릇을 했고, 류리크 가문이 갈라져 공국들이 분열하기 전까지 주도권을 행사했다.
몽골 제국 침공 시절이렇게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키예프 공국이었지만, 13세기 초엔 루스 공국들 간 전쟁으로 수차례 점령되고 약탈당했다.
그나마 명맥은 유지했으나 1240년에 몽골 제국에 침공받아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로 변했다.
결국 이 일로 북쪽의 노브고로드 공국과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에 주도권을 내주었고, 이후 블라디미르-수즈달에서 갈라져나온 모스크바 대공국이 키이우 계열 공국들을 완전히 정리하면서 동슬라브 지역의 역사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중심으로 흘러갔다.
14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킵차크 칸국의 지배로부터 키이우 일대를 해방시킨 이후로 15세기까지 리투아니아의 영토였으나 타타르족이 계속 침략하여 회복이 늦어졌다.
16세기 루블린 조약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연방 국가로 합쳐지는 와중에 키이우는 폴란드 왕국의 도시가 되었다.
코사크들이 우크라이나를 크림 타타르족으로 방어하기 시작하자 키이우 시의 인구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키이우 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요새 도시 중 하나에 불과했으나 코사크 헤트만 페트로 사하이다니치의 지도하에 다시금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키이우는 인쇄소를 적극 운영하고 성직자들의 부패를 일소하며 기강을 세워 우크라이나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코사크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봉기한 이후(대홍수 문서 참조) 키이우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19세기 말에는 러시아 산업혁명의 한 중심지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1934년에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수도를 하르키우에서 키이우로 옮겼다.
이 기간 중에 인구가 급속도로 팽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시절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으나 전후 빠르게 복구하여 소련 제3의 대도시가 되었다.
녹지가 많아서 소련에서 가장 푸른 도시라는 명성도 가지고 있었다.
후에 소련에서는 1982년 키예프 1500주년 기념 메달을 만들었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현장이 키이우에서 불과 100 km 떨어진 곳이었다.
키이우는 체르노빌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로 한국으로 따지면 서울-천안 정도의 거리에 불과하다.
체르노빌 폭발 사고 당시 2차 증기 폭발로 원전 바닥이 완전히 녹아버릴 위험성이 제기되었다.
그렇게 되면 키이우의 상수원인 드니프로 강은 그대로 방사능 오염이 되기 때문에 도시 전체를 고스란히 버려야 하는데, 당시 체르노빌 발전소 사고 현장에서 3명이 지하로 내려가 배수 밸브를 개장하는 영웅적인 행동으로 성공한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운 좋게도 사고 이후 바람이 며칠간 거의 줄기차게 남풍이 불었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치고는 방사능 낙진의 피해가 최소화되었다.
당시 사고로 인한 방사능 피폭 피해를 소련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정부가 완전히 은폐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사고 며칠 후 키이우 축제가 있었는데, 당시 우크라이나 당국은 축제를 취소하기는커녕 강행하여 축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방사능에 많이 피폭되었고, 1986년 키이우 5월 축제와 관련된 모든 사진 기록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가 완전 말소했다고 한다.
1991년 소련 연방 유지 투표에서는 투표에 참가한 소련 9개 공화국의 대도시들 중에 유일하게 반대표가 다수였다(44%). 현재 키이우는 서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와 함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친서방 성향이 가장 강한 도시인데, 이미 이때부터 조짐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8월 소련이 해체되고 각 공화국이 독립함에 따라 키이우는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수도가 되었다.
유로마이단 사진2013년 말부터 2014년 초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대규모 친서방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친러 정권을 전복시킨 유로마이단이 일어났다.
수도 키이우에서 출발하는 피난 행렬 영상공습에 대응하는 키이우의 우크라이나군 방공 시스템2022년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에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2월 24일부터 북쪽의 벨라루스에서 빠르게 밀고 내려온 러시아군을 막기 위한 최전방 전투 지역이 되었다.
키이우 전투 문서 참조.다.
4. 교통
- 도시철도: 키이우 지하철이 운행 중이고, 3개의 노선이 운행 중이다. 2025년 이후에는 4호선(오렌지색)도 개통될 예정이다. 과거 소련에서 중요한 노선이기도 했고 연식도 오래되었다.
- 기타 시내교통: 경전철, 노면전차, 버스, 미니버스, 트롤리버스 등이 있다.
- 철도: 키이우 역에서 모스크바 키옙스키 역, 몰도바, 폴란드, 헝가리 등 주변 각국으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다. 하지만 최소 16시간 이상은 가야 하는 건 함정. 그렇기 때문에 기차보다 비행기를 선호하는 추세이다. 기차는 일반 열차와 고속 급행 열차(인터시티)로 나뉘는데 일반 기차는 1, 2, 3등석이 있고 장거리 열차는 모두 침대 칸이다.
- 공항: 보리스필 국제공항과 줄리아니 국제공항이 있다. 보리스필 국제공항은 키이우 동쪽 29km 지점에 있는 단 러시아 노선은 상호 제재로 단항했고 에어 아스타나, 터키항공, LOT 폴란드 항공 등을 이용하여 들어와야 한다. 키이우 시내에 있는 키이우 줄리아니 국제공항은 유럽 서부로 통하는 공항이다. 안토노프 항공이 사용하는 호스토멜 공항도 있지만 화물 공항이어서 여객 노선은 취항하지 않는다.
5. 관광
우크라이나의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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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샤틴나 성당 터 Десятинна церква키이우 최초의 석조로 지어진 성당이 있던 곳으로, 블라디미르 대공을 비롯하여 교황 클레멘스 1세의 유해가 묻혀있던 곳이다. 중세시대 키이우 도시의 핵심 중 핵심었던 곳이었으나, 몽골족에게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이후 19세기에 새로이 재건되었으나, 사상적 이유로 종교를 탄압한 공산 정권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정부의 공식 재건계획이 잡혀있다. 우크라이나 국립 역사 박물관이 이 터 바로 옆에 위치해있다.
- 성 소피아 성당 Собор святої Софії (Софійський собор, Софія Киівська) Saint Sophia Cathedral, Kyiv같은 이름의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이름을 따와서 지어진 대성당. 1037년 키예프 루스의 야로슬라프 1세 대공이 비잔틴 양식으로 만들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우크라이나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는 물론 그리스 정교회와 가톨릭교회에서도 소유권을 주장하여 어떤 교단의 소유도 아니게 되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정부 소유의 박물관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으며, 전례의 경우 각 교단이 돌아가면서 할 수 있게 되어있다. 겉으로 보면 황금과 파스텔 톤 도색으로 깔끔하게 정비되어 오래된 성당이 아닌 것 같지만 내부에는 일부러 옛 모습으로 남겨둔 부분도 있어 천년의 세월을 느낄 수 있다.
-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 Михайлівський Золоверхий моностир본래 키예프 루스 시절인 1113년 스뱌토폴크 2세에 의해 지어진 수도원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레 황금으로 장식한 돔이 있는 성당이 있었으나 몽골족에 의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이후 꾸준히 복원과 증축을 거치고 황금을 씌운 돔과 지붕도 늘어나서 최종적으로 18세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우크라이나 SSR이 행정수도를 하르키우에서 키이우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정부 청사 건설을 위해 파괴했다가 소련 해체 이후 18세기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현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본부가 위치해있다.
- 황금문 Золоті ворота키예프 루스 시기 도시의 대표 성문으로 1024년에 완공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콘스탄티노플의 황금문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 마리인스키 궁 Маріїнський палац우크라이나 입법부인 최고 라다 의사당 옆에 위치해있으며, 현재는 대통령궁으로 사용 중이다. 18세기 러시아 제국에 의해 건축되었다.
- 성 안드리 성당 Андріївська церква십일조 성당 터 옆의 안드리 언덕에 18세기에 지어진 성당이다.
- 독립 광장 Майдан Незалежності(Майдан), 흐레시차티크 거리 Хрещатик우크라이나 독립을 이끌어낸 1990년 독립 시위가 처음 시작된 곳이며, 현재 우크라이나 광장 정치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유로마이단도 이곳을 주 무대로 일어났다. 원래 흐레샤티크 광장이었으나, 독립 이후 1991년 독립 광장으로 명명되었다. 이 광장 앞을 지나가는 큰 도로가 흐레시차티크 거리로, 키이우의 중심가이다.
- 키이우 동굴 수도원(페체르스크 수도원 Києво-Печерська лавра) Успенська Києво-Печерсьска лавра УПЦ(МП) Kyiv-Pecherck Lavra지하에 개미집처럼 깊고 복잡한 터널을 따라서 만들어진 역사깊은 대수도원. 성인들의 실제 미라가 다수 안치돼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러시아 정교회 소속이다.
- 제2차 세계대전 박물관 «Національний музей історії України у Другій світовій війні. Меморіальний комплекс» + 조국의 어머니상 «Батьківщина-Мати»키이우 동굴 수도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있다. 거대한 어머니상은 실제로 올라가볼 수 있다.
- 우크라이나 국립 체르노빌 박물관 Український Національний музей «Чорнобиль»(Національний музей «Чорнобиль»)멀지 않은 체르노빌에 직접 가 볼 수도 있지만 우크라이나 시내에서도 체르노빌 관련 전시를 볼 수 있다.
- 클럽 Closer키이우 시내 외곽에 있는 클럽 겸 복합 예술 문화 공간. 전자음악 및 테크노 신에서 주목받으며 떠올랐다. 내부에 레스토랑, 레코드 스토어가 있다.
6. 행정 구역
구
|
면적(km²)
|
인구(명)
|
명/km²
|
|
셰우첸키우스키 구
|
Шевченківський район
|
27.0
|
215,924
|
7,997
|
솔로미얀스키 구
|
Солом'янський район
|
40.0
|
384,616
|
9,606
|
스뱌토신스키 구
|
Святошинський район
|
103.0
|
341,886
|
3,319
|
오볼론스키 구
|
Оболонський район
|
110.2
|
318,137
|
2,887
|
페체르스키 구
|
Печерський район
|
20.0
|
163,672
|
8,184
|
포딜스키 구
|
Подільський район
|
34.0
|
209,133
|
6,144
|
홀로시이우스키 구
|
Голосіївський район
|
156.3
|
254,014
|
1,625
|
드니프로 강 우안
|
1,887,382
|
|||
다르니츠키 구
|
Дарницький район
|
134.0
|
348,401
|
2,600
|
데스냔스키 구
|
Деснянський район
|
148.0
|
368,461
|
2,490
|
드니프로우스키 구
|
Дніпровський район
|
66.7
|
357,936
|
5,366
|
드니프로 강 좌안
|
1,074,798
|
|||
키이우 시
|
836
|
2,962,180
|
3,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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