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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조용필
趙容弼 | Cho Yong-p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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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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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21일 (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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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쌍정리
(現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쌍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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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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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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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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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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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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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cm, 56kg, O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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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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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4녀 중 3남(여섯째)
배우자 안진현(1994년 ~ 2003년 사별) |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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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초등학교 (졸업)
송산중학교 (전학) 경동중학교 (졸업) 경동고등학교 (졸업) |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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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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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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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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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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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미8군 무대 '화이브 핑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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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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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엔카, 팝 록, 프로그레시브 록, 뉴웨이브, 신스팝, 얼터너티브 록, 전자음악, Funk, 하드 록, R&B, 퓨전 재즈, 사이키델릭 록, 오페라, 펑크 록, 민요, 동요, 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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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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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왕, 작은거인, 풀빵, 조방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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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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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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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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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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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한국 대중가요는 조용필과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며, 전통가요인 트로트부터 태생되어 다양한 장르로 분화되는 과정을 지켜봐온 한국 대중음악의 산증인이다.
데뷔 55년 동안 꾸준하게 현역 가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나이가 70세가 넘은 현재도 거의 매년 전국투어 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데뷔 55년 동안 꾸준하게 현역 가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나이가 70세가 넘은 현재도 거의 매년 전국투어 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2. 인물 소개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태생이다.
경동고등학교 1969년 25회 졸업생이다.
1968년 고등학생 시절 활동을 시작했고, 1979년 "창밖의 여자"로 정식 데뷔했다.
국내 탑클래스 가수만이 도전할 수 있는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에서 7회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콘서트 최다 관객 동원 타이틀도 당연히 조용필이 가지고 있다.
그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을 보유하고 있다.
LP, 테이프, CD, 음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진 가수다.
말이 필요 없는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지상파 연말 가요대상을 전관왕 4회 및 4연패 두번을 포함해 총 11회를 수상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1987년 더 나은 음악을 하고자 TV프로 대상 수상 거부를 선언한 결과다.
대한민국 가요계에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 명이며, 동시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타공인 타종불허 가요계의 제왕이다.
그렇다면 왜 최정상급 가수들도 조용필은 소위 '논외'로 해둘만큼 치켜세울까? 그저 선배라서? 선배 가수가 한둘이 아닐텐데? 아래 영상을 보면 얼추 답이 나온다.
조용필의 음악적 재능, 음악성, 그리고 엄청난 업적도 있지만 그의 겸손함과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인드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다.
조용필은 저런 멘션을 그저 웃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1980년대초부터 정규 19집을 낼 동안 끝없이 자신을 넘고 넘어왔다.
판소리와 락/팝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등, 장르를 초월한 가수가 그저 되는 게 아니다.
2013년 바운스가 히트할 때도 끝없이 배우고 도전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가왕이란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다름아닌 조용필 자신이다.
2011년 4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이 본인에겐 민망하다며 크게 마음에 담아두진 않는다고 한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한다.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가수이기도 하다.
당시 9시 뉴스에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이례적으로 내보낼 정도였다.
이 단어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는지 '오빠부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여러분, 기도하는~의 다음 가사를 아십니까? 바로 꺄악~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미8군 출신의 마지막 히트가수이다.
미8군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고 프로들의 무대였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다.
다.
경동고등학교 1969년 25회 졸업생이다.
1968년 고등학생 시절 활동을 시작했고, 1979년 "창밖의 여자"로 정식 데뷔했다.
국내 탑클래스 가수만이 도전할 수 있는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에서 7회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콘서트 최다 관객 동원 타이틀도 당연히 조용필이 가지고 있다.
그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을 보유하고 있다.
LP, 테이프, CD, 음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진 가수다.
말이 필요 없는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지상파 연말 가요대상을 전관왕 4회 및 4연패 두번을 포함해 총 11회를 수상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1987년 더 나은 음악을 하고자 TV프로 대상 수상 거부를 선언한 결과다.
대한민국 가요계에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 명이며, 동시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타공인 타종불허 가요계의 제왕이다.
그렇다면 왜 최정상급 가수들도 조용필은 소위 '논외'로 해둘만큼 치켜세울까? 그저 선배라서? 선배 가수가 한둘이 아닐텐데? 아래 영상을 보면 얼추 답이 나온다.
조용필의 음악적 재능, 음악성, 그리고 엄청난 업적도 있지만 그의 겸손함과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인드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다.
조용필은 저런 멘션을 그저 웃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1980년대초부터 정규 19집을 낼 동안 끝없이 자신을 넘고 넘어왔다.
판소리와 락/팝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등, 장르를 초월한 가수가 그저 되는 게 아니다.
2013년 바운스가 히트할 때도 끝없이 배우고 도전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가왕이란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다름아닌 조용필 자신이다.
2011년 4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이 본인에겐 민망하다며 크게 마음에 담아두진 않는다고 한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한다.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가수이기도 하다.
당시 9시 뉴스에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이례적으로 내보낼 정도였다.
이 단어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는지 '오빠부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여러분, 기도하는~의 다음 가사를 아십니까? 바로 꺄악~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미8군 출신의 마지막 히트가수이다.
미8군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고 프로들의 무대였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다.
다.
2.1. 주요 영상
3. 경력
조용필은 경기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학창시절 음악에 푹 빠져 지냈고 결국 고3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게 된다.
이후 1968년에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미8군이라 하면 현재의 나이트클럽 밤무대같은 걸로 연상한다든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을텐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1960~1980년대의 모든 대중음악 활동의 큰 장이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파이브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년 5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김대환(드럼),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 음반도 발매하였다.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컬 '사랑의 일기'라는 음반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음반이다.
이 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직후 1972년 스테레오 힛트 앨범 제 1집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음반을 내는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72년 "그룹 25시"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 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도 롯데 자이언츠의 1순위 응원가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었다.
사실 이 대마초 사건은 당시 대마초에 느슨했던 대중예술계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으며 조용필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연예계 전반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조용필 본인은 대마초 파동 이전 활동 및 음반에 대해서 습작 성향이 짙고 부족한게 많아서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때 조용필은 붙잡혀서 고문까지 당했고 채혈까지 했지만 대마초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애초에 잡혀간 이유가 이 때로부터 거의 10년전에 미군 공연 초창기 시절에 조용필이 친해진 미군의 권유로 대마초를 한번 피웠다가 몸에 안 맞아서 다시는 안 피웠다는 이야기를 과거에 동료들에게 했던 것이, 당시 연예계를 조지려고 들던 검사와 형사들의 조사로 그들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태어나서 딱 한번 피우고 몇 년동안 안 피운 대마초 성분이 몸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10년이면 중금속도 검출이 안 된다.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년 뒤인 1980년에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되었다.
그는 학창시절 음악에 푹 빠져 지냈고 결국 고3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게 된다.
이후 1968년에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미8군이라 하면 현재의 나이트클럽 밤무대같은 걸로 연상한다든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을텐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1960~1980년대의 모든 대중음악 활동의 큰 장이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파이브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년 5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김대환(드럼),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 음반도 발매하였다.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컬 '사랑의 일기'라는 음반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음반이다.
이 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직후 1972년 스테레오 힛트 앨범 제 1집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음반을 내는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72년 "그룹 25시"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 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도 롯데 자이언츠의 1순위 응원가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었다.
사실 이 대마초 사건은 당시 대마초에 느슨했던 대중예술계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으며 조용필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연예계 전반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조용필 본인은 대마초 파동 이전 활동 및 음반에 대해서 습작 성향이 짙고 부족한게 많아서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때 조용필은 붙잡혀서 고문까지 당했고 채혈까지 했지만 대마초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애초에 잡혀간 이유가 이 때로부터 거의 10년전에 미군 공연 초창기 시절에 조용필이 친해진 미군의 권유로 대마초를 한번 피웠다가 몸에 안 맞아서 다시는 안 피웠다는 이야기를 과거에 동료들에게 했던 것이, 당시 연예계를 조지려고 들던 검사와 형사들의 조사로 그들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태어나서 딱 한번 피우고 몇 년동안 안 피운 대마초 성분이 몸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10년이면 중금속도 검출이 안 된다.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년 뒤인 1980년에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되었다.
3.1. 음반
조용필의 정규 음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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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대표곡
대표곡은 "걷고 싶다", "고독한 Runner", "고추잠자리", "그 겨울의 찻집",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그대여", "강원도 아리랑", "기다리는 아픔", "꿈", "나는 너 좋아", "눈물의 파티", "내 이름은 구름이여", "님이여",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돌아오지 않는 강", "마도요", "모나리자", "못찾겠다 꾀꼬리", "물망초", "미워 미워 미워", "미지의 세계", "바람이 전하는 말", "바람의 노래", "Bounce", "비련", "빛", "상처" , "서울 서울 서울", "선구자", "슬픈 미소", "슬픈 베아트리체", "어제, 오늘, 그리고", "여와 남", "여행을 떠나요",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일편단심 민들레야" , "정의 마음", "창밖의 여자", "촛불", "추억속의 재회", "친구여", "Q", "킬리만자로의 표범", "태양의 눈", "한강", "한오백년", "허공", "Hello" 등 매우 많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이 히트곡으로만 구성되었는데도 양일 겹치는 노래 없이 이틀이나 진행되었다.
실제로 본인도 콘서트 멘션 중 발표한 곡이 너무 많아서 다 하려면 며칠을 해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조용필의 콘서트가 끝난 뒤 콘서트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oo가 듣고 싶었는데" 하는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멘션도 거의 없이 노래로 모든 공연을 꾸며서 타 가수들에 비해 콘서트에서 부르는 곡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이 정도니 히트곡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이 히트곡으로만 구성되었는데도 양일 겹치는 노래 없이 이틀이나 진행되었다.
실제로 본인도 콘서트 멘션 중 발표한 곡이 너무 많아서 다 하려면 며칠을 해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조용필의 콘서트가 끝난 뒤 콘서트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oo가 듣고 싶었는데" 하는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멘션도 거의 없이 노래로 모든 공연을 꾸며서 타 가수들에 비해 콘서트에서 부르는 곡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이 정도니 히트곡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3.3. 출연 광고
- 하이트진로 크라운맥주
- 롯데제과
- LG전자 하이테크 스테레오, 하이파이VTR, 금성미라클TV
- 일화 맥콜
- 부일이동통신
4. 평가
4.1. 창법/예술력
한창 활동할 당시엔 노래부터 작곡, 편집, 무대연출까지 못하는 게 없는 초인이었다.
사운드, 공연 퀄리티도 당시 기준으론 압도적이었다.
데뷔곡 '창밖의 여자'는 드라마 주제곡 하나 써 달라는 라디오 PD 주문에 즉석에서 5분만에 작곡한 노래라는 말도 있는데 실제로는 15~2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나는 가수다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부분. 창법의 경우 현시대의 (믹스보이스적인) 발성과 창법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애초에 창법에 우위 논쟁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발성이나 창법 자체에 대한 지식이 지금보다 못하던 당시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해가는 부분도 있다.
조용필의 가창력은 최정상의 실력이다.
50주년 콘서트 당시 2시간 내내 20여 곡을 라이브로 소화했을만큼 그의 목 내구도는 수준급이다.
원래 데뷔 초기에는 선천적인 미성으로 노래를 했으나, 이후 대마초 파동 당시 자숙하던 도중에 판소리에 매료되어 공부하기 시작하고, 로드 스튜어트와 조 카커 등 허스키한 보컬들의 음악도 참고하면서 지금의 창법이 되었다.
한 기자가 '어느 정도의 음역까지 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기타를 만지며 '이게 낼 수 있는 소리 정도는 뭐든지'라고 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보컬 트레이닝과 발성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성대모사에서 볼 수 있듯 고도로 앞쪽에 집중된 비음이 듣기 불편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조용필만의 개성이라고 느끼는 청중 또한 많다.
한편으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상당히 두터운 탁성을 구사한 바도 있는데 이때의 가창스타일이 조용필 커리어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판소리를 연마한 이후로 벨팅스러운 창법을 활용하는데, 특유의 개성있는 톤과 어울려 댐핑감을 선사한다.
다만 입을 벌리는 크기가 작고 상, 하악의 움직임이 큰 편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인 골라도 포함한다.
특이점으로는 저음, 중음, 고음에서의 파장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인데, 보통 파사지오를 넘겨 고음으로 치솟을수록 소리가 커지는 것과 달리 조용필의 경우 세기가 상당히 일정하게 나타난다.
이는 초창기의 발성과 중후반기의 발성이 바뀌면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는데, 9집까지의 발성이 흔히 그 시대 어른들이 말하는 지르는 방식으로 감정 조절보다는 후련하게 내뱉는 판소리식 발성에 가까웠다면, 10집 이후로 앨범에 직접 참여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신이 만드는 곡에 보컬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비음이 강조된 보컬은 바로 이 10집 때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원래 밴드 기타리스트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리듬을 굉장히 잘 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살펴보면, 특히 중후반기의 앨범의 경우 베이스를 중심으로 꽤 펑키하거나 재즈풍 리듬의 곡(10집-I Love you/모나리자, 12집-내 모습, 13집-어젯밤 꿈속에서, 14집-Jungle City) 이나 뉴웨이브 스타일의 록 음악(13집-꿈꾸던 사랑), 심지어 트립합 (14집-흔들리는 나무)까지 종종 등장하는데, 미묘하게 싱코페이션을 음마다 컨트롤 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발성으로 따졌을 때 자음을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된소리로 강조하는 방식이 이런 리듬웍과 묘하게 상성이 맞으면서 생기는 효과 중 하나. 이런 점 때문에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보컬에 맞게 곡을 쓰고 편곡하는 레벨이 상당히 높다고 인정받는다.
라이브를 할 때와 스튜디오에서의 음색이 조금 차이가 있는데, 음반에서는 주로 더블링으로 녹음하기 때문에 보컬이 보다 두껍게 들리는 편이다.
라이브에서의 목소리는 그에 비해 가늘지만 커다란 성량으로 이를 어느정도 커버한다.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인데, 본인 노래의 대부분에 코러스까지 다 해먹는(...) 몇 안되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다.
소리 자체가 가늘지만 워낙 다각도로 활용도 잘하고 음정까지 정확하게 딱딱 들어맞는 보컬이라 주멜로디의 화음을 자기 보컬로 다 채워넣으면서 곡을 더 맛깔나게 하는 데에 있어서 초고수다.
보통 이런 방식은 주로 블랙 뮤직을 장기로 하는 보컬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킨 부분에 대해서 뮤지션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활동 초기에는 가창력에 대해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미8군 시절 패티김, 조영남 등의 스탠더드 팝류의 보컬이 트렌드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가늘고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조용필은 마치 트로트를 연상시켜서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메이저로의 진출 전까지는 감정 표현이 부족한 가수라는 평가도 받았었다.
단지 시대가 만든 편견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 시대의 전설적인 세시봉 출신이자 가창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송창식이 거의 그 시대 유일하게 그를 꿰뚫어 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를 단 한명만 꼽아보라는 말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필을 지목했던 일화도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조용필은 1980년대 음반 뽑아내기에만 급급한 소속 레코드 사와의 갈등 속에서 음악적 퀄리티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이어간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표현하는 자신의 창법이 듣기에 과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는 창법을 이어가게 된다.
실제로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식으로 길게 끄는 느낌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의 딱딱 끊는 느낌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유의 창법은 조용필을 다른 가수들과 구분짓는 특징이 되어 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용필의 노래를 듣지못한 채 성대모사만 들은 젊은 층들은 조용필을 '특이하게 노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앨범이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노래의 특징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재능과 감각이 타고났으나 그뿐만 아니라 그만의 목소리를 만드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있었다.
득음을 하기 위해 노래 연습하다가 각혈이 나오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래 연습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만 2013년 SBS에서 방영된 조용필 스페셜에서 인터뷰어였던 이승기가 "득음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셨다는 일화가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에요. 목에서 피가 나면 죽지요."라며 웃으며 대답했다.
재능과 노력이 지금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 이런 창법이 불을 뿜는 대표곡들을 꼽자면 한오백년, 자존심, 한강 등 민요풍 노래 외에도 창밖의 여자, 촛불 등 다른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음악적으로 시도한 장르도 매우 다양했다.
록 음악(미지의 세계), 팝(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재즈(단발머리), 일렉트로니카(아하! 그렇지),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 더 무서운건 저렇게 시도를 하고 대부분 다 성공을 했다는데 있다.
18집에서 안토닌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신세계 교향곡)에 가사를 붙인 '내일을 위해'라는 곡에서 오페라가 아닌 클래식, 19집의 타이틀곡인 Hello의 경우엔 버벌진트의 피처링으로 Rap까지 섭렵했다.
이러한 수많은 노력과 그의 천재성으로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장르들이 대중가요라는 하나의 용광로처럼 녹아든 것은 상당수가 그의 공헌이다.
또한 고령의 나이가 무색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젊은 트렌드에 맞춰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데, 평소 케이티 페리, 브루노 마스, 마룬 5, Imagine Dragons와 같은 음악도 즐겨 듣고 19집 작업의 모토를 아예 '음악의 깊이' 보다는 '편안함'과 '세대 간의 융합'으로 잡았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Hello와 Bounce라는 젊은 가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곡들이 나왔다.
그의 콘서트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면, 지하철 배차 간격이 바뀌며, 막차시간이 2시간 연장되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김정일도 조용필의 '허공'을 애청했다고 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당시였으니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이 쓰는 대북 관련 책자들에서도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조용필 노래를 몰래 듣고 다닌다고 하는 얘기 정도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었다.
또한 진짜 립서비스였다 하더라도 그 많은 가수 중 조용필을 언급했다는 데서 그의 위용을 알 수 있는 게 된다.
2011년 문화일보가 실시한 창간 20주년 '대중음악사 20년 최고의 가수와 노래' 조사에서 당당하게 가수와 노래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2위는 이승철, 3위가 서태지, 4위가 김건모, 5위가 소녀시대다.
사운드, 공연 퀄리티도 당시 기준으론 압도적이었다.
데뷔곡 '창밖의 여자'는 드라마 주제곡 하나 써 달라는 라디오 PD 주문에 즉석에서 5분만에 작곡한 노래라는 말도 있는데 실제로는 15~2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나는 가수다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부분. 창법의 경우 현시대의 (믹스보이스적인) 발성과 창법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애초에 창법에 우위 논쟁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발성이나 창법 자체에 대한 지식이 지금보다 못하던 당시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해가는 부분도 있다.
조용필의 가창력은 최정상의 실력이다.
50주년 콘서트 당시 2시간 내내 20여 곡을 라이브로 소화했을만큼 그의 목 내구도는 수준급이다.
원래 데뷔 초기에는 선천적인 미성으로 노래를 했으나, 이후 대마초 파동 당시 자숙하던 도중에 판소리에 매료되어 공부하기 시작하고, 로드 스튜어트와 조 카커 등 허스키한 보컬들의 음악도 참고하면서 지금의 창법이 되었다.
한 기자가 '어느 정도의 음역까지 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기타를 만지며 '이게 낼 수 있는 소리 정도는 뭐든지'라고 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보컬 트레이닝과 발성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성대모사에서 볼 수 있듯 고도로 앞쪽에 집중된 비음이 듣기 불편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조용필만의 개성이라고 느끼는 청중 또한 많다.
한편으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상당히 두터운 탁성을 구사한 바도 있는데 이때의 가창스타일이 조용필 커리어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판소리를 연마한 이후로 벨팅스러운 창법을 활용하는데, 특유의 개성있는 톤과 어울려 댐핑감을 선사한다.
다만 입을 벌리는 크기가 작고 상, 하악의 움직임이 큰 편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인 골라도 포함한다.
특이점으로는 저음, 중음, 고음에서의 파장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인데, 보통 파사지오를 넘겨 고음으로 치솟을수록 소리가 커지는 것과 달리 조용필의 경우 세기가 상당히 일정하게 나타난다.
이는 초창기의 발성과 중후반기의 발성이 바뀌면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는데, 9집까지의 발성이 흔히 그 시대 어른들이 말하는 지르는 방식으로 감정 조절보다는 후련하게 내뱉는 판소리식 발성에 가까웠다면, 10집 이후로 앨범에 직접 참여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신이 만드는 곡에 보컬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비음이 강조된 보컬은 바로 이 10집 때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원래 밴드 기타리스트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리듬을 굉장히 잘 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살펴보면, 특히 중후반기의 앨범의 경우 베이스를 중심으로 꽤 펑키하거나 재즈풍 리듬의 곡(10집-I Love you/모나리자, 12집-내 모습, 13집-어젯밤 꿈속에서, 14집-Jungle City) 이나 뉴웨이브 스타일의 록 음악(13집-꿈꾸던 사랑), 심지어 트립합 (14집-흔들리는 나무)까지 종종 등장하는데, 미묘하게 싱코페이션을 음마다 컨트롤 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발성으로 따졌을 때 자음을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된소리로 강조하는 방식이 이런 리듬웍과 묘하게 상성이 맞으면서 생기는 효과 중 하나. 이런 점 때문에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보컬에 맞게 곡을 쓰고 편곡하는 레벨이 상당히 높다고 인정받는다.
라이브를 할 때와 스튜디오에서의 음색이 조금 차이가 있는데, 음반에서는 주로 더블링으로 녹음하기 때문에 보컬이 보다 두껍게 들리는 편이다.
라이브에서의 목소리는 그에 비해 가늘지만 커다란 성량으로 이를 어느정도 커버한다.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인데, 본인 노래의 대부분에 코러스까지 다 해먹는(...) 몇 안되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다.
소리 자체가 가늘지만 워낙 다각도로 활용도 잘하고 음정까지 정확하게 딱딱 들어맞는 보컬이라 주멜로디의 화음을 자기 보컬로 다 채워넣으면서 곡을 더 맛깔나게 하는 데에 있어서 초고수다.
보통 이런 방식은 주로 블랙 뮤직을 장기로 하는 보컬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킨 부분에 대해서 뮤지션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활동 초기에는 가창력에 대해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미8군 시절 패티김, 조영남 등의 스탠더드 팝류의 보컬이 트렌드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가늘고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조용필은 마치 트로트를 연상시켜서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메이저로의 진출 전까지는 감정 표현이 부족한 가수라는 평가도 받았었다.
단지 시대가 만든 편견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 시대의 전설적인 세시봉 출신이자 가창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송창식이 거의 그 시대 유일하게 그를 꿰뚫어 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를 단 한명만 꼽아보라는 말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필을 지목했던 일화도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조용필은 1980년대 음반 뽑아내기에만 급급한 소속 레코드 사와의 갈등 속에서 음악적 퀄리티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이어간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표현하는 자신의 창법이 듣기에 과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는 창법을 이어가게 된다.
실제로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식으로 길게 끄는 느낌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의 딱딱 끊는 느낌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유의 창법은 조용필을 다른 가수들과 구분짓는 특징이 되어 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용필의 노래를 듣지못한 채 성대모사만 들은 젊은 층들은 조용필을 '특이하게 노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앨범이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노래의 특징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재능과 감각이 타고났으나 그뿐만 아니라 그만의 목소리를 만드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있었다.
득음을 하기 위해 노래 연습하다가 각혈이 나오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래 연습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만 2013년 SBS에서 방영된 조용필 스페셜에서 인터뷰어였던 이승기가 "득음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셨다는 일화가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에요. 목에서 피가 나면 죽지요."라며 웃으며 대답했다.
재능과 노력이 지금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 이런 창법이 불을 뿜는 대표곡들을 꼽자면 한오백년, 자존심, 한강 등 민요풍 노래 외에도 창밖의 여자, 촛불 등 다른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음악적으로 시도한 장르도 매우 다양했다.
록 음악(미지의 세계), 팝(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재즈(단발머리), 일렉트로니카(아하! 그렇지),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 더 무서운건 저렇게 시도를 하고 대부분 다 성공을 했다는데 있다.
18집에서 안토닌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신세계 교향곡)에 가사를 붙인 '내일을 위해'라는 곡에서 오페라가 아닌 클래식, 19집의 타이틀곡인 Hello의 경우엔 버벌진트의 피처링으로 Rap까지 섭렵했다.
이러한 수많은 노력과 그의 천재성으로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장르들이 대중가요라는 하나의 용광로처럼 녹아든 것은 상당수가 그의 공헌이다.
또한 고령의 나이가 무색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젊은 트렌드에 맞춰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데, 평소 케이티 페리, 브루노 마스, 마룬 5, Imagine Dragons와 같은 음악도 즐겨 듣고 19집 작업의 모토를 아예 '음악의 깊이' 보다는 '편안함'과 '세대 간의 융합'으로 잡았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Hello와 Bounce라는 젊은 가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곡들이 나왔다.
그의 콘서트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면, 지하철 배차 간격이 바뀌며, 막차시간이 2시간 연장되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김정일도 조용필의 '허공'을 애청했다고 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당시였으니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이 쓰는 대북 관련 책자들에서도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조용필 노래를 몰래 듣고 다닌다고 하는 얘기 정도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었다.
또한 진짜 립서비스였다 하더라도 그 많은 가수 중 조용필을 언급했다는 데서 그의 위용을 알 수 있는 게 된다.
2011년 문화일보가 실시한 창간 20주년 '대중음악사 20년 최고의 가수와 노래' 조사에서 당당하게 가수와 노래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2위는 이승철, 3위가 서태지, 4위가 김건모, 5위가 소녀시대다.
5. 여담
-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1981년에 그 사랑, 한이 되어라는 로맨스 영화에 주연으로 나온 바 있다. 다른 포스터 이 영화는 이후로 묻혀져서 그야말로 보기 어려운 영화가 되었다가 2009년에 팬들이 소규모 재상영을 가졌다. 그래도 한국영상자료원이 필름을 보관하고 있어 이따금 틀어주기도 한다. 근래 상영은 2017년 10월 18일과 20일로 되어있다.
- 트로트 가수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원래 락 밴드로 음악을 시작한 사람이다. 지금도 본인의 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보컬리스트 겸 세컨 기타리스트(리듬 기타리스트)이다. 반 세기를 해 온 만큼 기타 실력 또한 뛰어나며, 2000년대 이후에는 기타리스트임을 강조하지 않고 있지만, 기타 연주(특히 전기 기타) 잘 하는 가수로 알려져 있던 80-90년대 앨범이나 위대한 탄생 공연 포스터에는 대부분 기타를 들고 있다. 물론 현재도 공연 중에 자주 기타를 든다.
- 조용필의 노래 허공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뮤직비디오를 찍은 노래며 이 뮤직비디오에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혜수가 출연했다.
-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을 때 신해철이 속해있던 무한궤도의 곡 '그대에게'의 강렬한 전주에 꽂혀 바로 대상감으로 점찍었는데 실제로 무한궤도가 대상을 거머쥐었다. 그대에게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그대에게'의 전주는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신해철의 전략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왕에게 먹혔으니 제대로 성공한 셈이다.
-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조용필도 이를 염두에 두고 '서울 서울 서울'을 만들었으며 본인이 직접 88올림픽 D-100기념 축제에서 밝혔다. 다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주제곡을 노리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곡 자체는 주제곡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조로 구성되어있다.
- 한때 일본에서도 가수로 왕성하게 활약했다. 1990년대 초, 한류라는 단어조차 형성이 안 됐을 때, 이미 조용필은 일본인에게도 잘 알려진 한국의 가수였다. 엔카, 록 음악, 발라드 등의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일본에서는 주로 엔카 가수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조용필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想いで迷子(오모이데마이고, 추억의 미아)'는 전국적으로 대히트, 일본 내에서 100만장 이상을 판 플래티넘이 되었다. 1994년 기준으로 일본 내 조용필의 음반 누적 판매량은 공식적으로 600만장, 비공식적으로는 800만장이라고 하나, 이는 과장된 면이 많다.우선 조용필의 일본 내 최대 히트곡인 '想いで迷子'는 1986년에 발표된 후 1987~1988년에 걸쳐 꾸준히 사랑받은 히트곡은 맞다. 오리콘 주간 최고 순위는 13위이지만 1988년까지 꾸준히 팔려 1988년 오리콘 싱글 연간 차트 35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00만 장이 팔렸다는 것은 과장이 심하게 들어간 것이다. 일단 1988년 연간 차트에서 '想いで迷子'가 기록한 판매량은 21.8만 장이다. 그런데 '想いで迷子'는 1986~1987년 연간 차트에는 못 들어갔고, 1986년, 1987년 연간 차트의 50위 작품 판매량은 19.3만 장과 15.3만 장이다. 즉 '想いで迷子'가 1986~1987년에 연간 50위권에 아슬아슬하게 못 들어갔다고 가정해도 총 판매량이 19.3+15.3+21.8=56.4만 장을 넘을 수가 없다. 최대 히트곡인 '想いで迷子'가 이 정도고, 또다른 대표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26만 장 정도가 팔렸다고 하니, 조용필의 총 음반 판매량이 600만 장을 넘었다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조용필의 소속사 측이 일본 내 인기를 과장/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일본에서의 음반 판매 기록으로는 김연자가 더 많이 팔았다. 1980년대까지 국내와 일본에서 잘 알려진 남성 트로트 장르 가요는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는데, 조용필 이후 일본에서의 인지도 1위 남성 트로트 가요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뀌었다. 국내에서도 김정구 사후 '눈물 젖은 두만강'이 점점 잊혀 가고 있는 데 비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아직도 줄기차게 불리고 있다. 그 외에 조용필은 '想いで迷子' 외에도 '夢夜舟(꿈의 밤배)', '愛の共犯者(사랑의 공범자)', '紅い落葉(붉은 낙엽)', '悲しみのゆくえ(슬픔의 행방)' 등의 여러 곡을 발표했다.
- 다만 일본 활동 당시 판매량 문제와는 별개로 한국을 대표하는 인기 가수로서 사실상 국가대표급 대우를 많이 받았다. 특히, 한국 쪽의 푸시도 엄청났는데, 당시 일본 인기 엔카 가수들을 한국에 초청해 합동 공연을 열기도 했고 한국 지상파에도 나왔다. 그리고 인기 엔카 가수들이라고 보기도 무리도 많은게 가장 친했던 다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나카지마 미유키와 같은 장르를 하는 뮤지션이다. 본의 아니게 엔카 느낌의 노래를 만들기는 했지만, 본질은 사다 마사시와 나카지마 미유키처럼 포크 가수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라 당시 일본 가수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라 임팩트가 컸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임팩트가 컸는지 반대로 일본 문화가 다시 한국을 파고든다며 이를 비난하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조용필이 초청한 일본 가수들과 친분이 있는 일본 가수들은 일본 내에서도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고 또한 추억의 가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절친인 다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いい日旅立ち(좋은 날의 여행)', '昴(묘성)'과 같은 세기의 명곡들을 남겼으며, 특히 'いい日旅立ち'는 불세출의 가희인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 꼽히며, 그 작사 작곡을 맡은 게 다름아닌 다니무라 신지였었고 또한 조용필도 'いい日旅立ち'를 불렀다. 또한 호리우치 타카오, 모리 신이치, 후세 아키라 등과도 친했으며 탁월한 음악적 재능과 가창력을 보인 가수들이었다. 그로 인해 조용필을 좋아하는 노인들 중에서 조용필로 인하여 일본 노래를 접한 사람들도 많아지기도 했다. 현재도 한류가수들의 인기의 척도로 종종 거론되는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1987~1990년)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최후의 출연이던 1990년 같은 경우 서울 롯데월드 현지 중계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부른 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참고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 기네스북에서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외국 가수의 노래' 로 등재되었으며, (약 30회 이상) 일본 내에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일본에 진출한 한국배우/한국가수를 통틀어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2002년 20대를 겨냥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위였다.
- 천재라고 불리는 비운의 가수 유재하의 최고의 히트곡이자 명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사실 조용필 음반에 먼저 수록되어있다. 위대한 탄생의 멤버였던 당시 새파란 20대의 청년이던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너 곡 좀 써봐라라고 이야기 하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유재하가 참여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도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혼자서 있는 곡 다 가져다줬는데 형평성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어서 유재하가 삐져서 봄여름겨울을 나갔다고 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밝혔다. 이때 김현식에게 가져다준 곡은 명곡인 '가리워진 길'이다. 그 10곡은 이후 유재하 1집의 수록곡이자 그의 유작 음반이 된다.
- 조용필은 대중문화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아이들이 보는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조차도 조용필의 '친구여'라는 노래가 나온다. 그 노래를 들은 둘리는 감격하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눈물을 쏟는다.
- 1980년대 엄청난 인기 가수였지만 당시 연예인을 무시하던 사회풍조 탓에 황당한 시비도 많이 당했다.1985년에는 카페에서 함께 술 마시자는 제안을 거절했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전치 5주의 부상을 입기도 했다.
- 1991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KBO 리그 개막전에 초청되어 애국가를 열창하다가, 마지막의 '길이 보전하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잘못 부른 적이 있다. 본인은 '카메라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서'라고 해명했지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어쨌는지 이후 애국가를 부르는 초청 자리에는 가지 않고 있다.
- 1993년 해운대 콘서트에서 1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나, 1992년 서태지의 등장과 더불어 "슬픈 베아트리체", "고독한 러너" 등이 실린 14집과 "남겨진 자의 고독"의 15집이 흥행 실패하며 일시적인 침체기에 돌입했었다. 조용필 본인도 신해철의 음악도시에 출연해 이 시기를 가장 아쉬운 시기로 언급하기도 했다. 94년 안진현과 재혼 및 전담 밴드인 위대한 탄생과 재결합하며 비로소 방송 활동을 재개하며 16집 "바람의 노래"로 모처럼 대중의 반응을 얻었다. 이후 1998년 올림픽공원에서 30주년 공연 콘서트 및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 공연이 흥행하며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1999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첫 공연(대중가수로는 처음)을 치르며 "가왕" 이미지를 굳혀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을 연말 마무리 콘서트장으로 삼았다.
- 2003년 데뷔 35주년 공연부터 잠실 주경기장 공연을 즐겨(?) 개최하기 시작한다. 2005년에 북한 공연 이후 다시 잠실 공연을 하게 되는데 공교롭게 2003년과 2005년 모두 제대로 비를 만나는 바람에 관객들은 우비를 입고 스탠딩으로 물 반 땀 반 야광봉을 흔들었다. 조용필 본인도 05년 공연은 특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중간에는 스스로 신난 나머지 "비 상관없지 않아요??" 드립을 시전하시다 "비가...음... 조금 덜 오네요" 라고 민망해하며 수습하기도 하였다. (팬들에게는 이런 썰렁함이 매력이기도 하다.) 뒤로는 다행히도 비는 피했으나 2018년 5월 12일 50주년 콘서트때 하루종일 비가 왔다(...).
- 2010년 5월 28~29일 열린 콘서트(Love In Love) 에서 잠실 주경기장에 1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60세의 나이에도 라이브로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역시나 황제라는 것을 보여줬다. 관객들은 대부분이 4~50대였지만, 노래를 부를 때 열광하는 건 20대로 돌아간 듯 했다고 한다. 특히나 본 공연의 수익금은 소아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기부했는데, 그 액수만도 수십억원대에 달한다.
- 어쩌다보니 군가 진짜 사나이를 널리 알린(?) 가수이기도 하다. 1980년대 당시에는 음반 발표시 꼭 건전가요(...)를 넣도록 되어있었는데, 7, 8, 9집에다가 건전가요로 진짜 사나이를 자신이 직접 불러넣어둔 것이다. 다만 재발매본에서는 빠져있다.
- 조용필 콘서트에 갔었던 아티 콘펠드의 말로는, 조용필의 우드스탁(미국 오리지널 말고 한국에서 개최된 우드스탁을 말한다)의 참가는 그의 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가수 가운데 이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 락의 대부인 신중현이나 조용필 스스로도 존경하는 가수라고 밝힌 패티 김 정도다. 재미있는 사실은 패티 김은 자신에게 국민가수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진정한 국민가수는 조용필과 이미자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는 것이다.
- 1980년대 후반 연말 시상식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이유는 알다시피 조용필의 독주 체제에 제동을 걸만한 가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 조용필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KBS, MBC의 가수왕자리를 계속 차지했는데, 예외적으로 MBC에서 1982년 이용, KBS에서 1984년에 김수철, 1986년에 전영록이 가수왕을 차지했다. 또한 이것은 스스로의 의지기도 했다.
-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대표주자였던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우승자에게 골든컵을 준 다음 명예 졸업을 시키는 시스템은 조용필의 히트곡이 1위를 너무 독주해서 그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사실상 그 이유가 맞다고 봐야 한다. 골든컵이 처음 도입될 때는 5주가 아니라 10주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 2011년 4월 15일엔 작년에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소록도를 방문해 공연을 했다. 2009년 전남 고흥과 소록도를 잇는 다리가 완공된 이후 많은 가수들이 위문차 방문하였고, 그 때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진짜 다시 방문한 사람은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는 소규모 강당에서 즉석에서 요청곡을 받고 중간에는 무대에서 내려와 같이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노래를 부르는 등 주민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2011년 5월 7일 서울 올림픽공원 콘서트를 시작으로 2개월간 전국 투어를 열었다. 이번에는 관객 앞으로 움직이는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2011년 올해의 콘서트 티켓 최다 판매 가수의 기록을 세웠다. 2위는 이승철인데 이승철이 29회 공연한 반면 조용필은 이에 절반인 14회 공연만으로 티켓 파워에서 앞섰다.
- '나는 조용필이다'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생각하면 MBC프로그램들과 인연(?)이 꽤 있는데 결국 2011년 9월 25일 나는 가수다에 특별출연했다.
- 2013년 4월 23일 정규 19집 Hello의 발매가 확정되었다. 4월 16일 선공개곡 'Bounce'가 발표되었는데 발표되자마자 음원차트 1위를 찍었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은 가수가 차트 1위를 탈환한 케이스 자체가 국내에 전무하다. 진짜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LP로 데뷔하여 카세트테이프와 CD를 거쳐 디지털 음원까지 석권한 가수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음원 소비 연령대를 분석한 멜론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의 여타 히트곡과 비교해도 소비자층의 분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즉 조용필의 히트곡을 듣고 자란 4~50대에 한정된 호응이 아닌, 음원 차트의 주요 소비자이면서 조용필을 잘 모르는 10~20대가 듣기에도 충분히 먹히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인 셈. 말 그대로 국민가수다.
- 2013년 4월 23일 19집 전곡을 발표하면서 쇼케이스가 진행되었으며, 이때 오프닝으로 국카스텐이 '모나리자'를 불렀고, 박정현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자우림은 '꿈'을 열창하면서 가왕의 귀환을 축하했다.
- 2013년 5월 3일. 23년 전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로 23년 만에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으로서 뮤직뱅크 1위를 차지했다. 그의 나이가 2013년 기준으로 63세라는 진갑을 넘은 나이인데다가 아이돌들이 강세를 보였던 가요프로에서 60대 최고령 가수로서는 최초로 1위를 차지하게 된 이례적인 사례다.
- 조용필의 가요프로 1위 횟수는 (지상파 3사 기준 음악방송 1위 기록을 모두 포함해 다음과 같이 무려 78회로 모든 가수들중 가장 많은 수상을 하였으며, Hello도 케이블 채널 MBC뮤직 '쇼 챔피언'에서 1위를 차지 했다. 1981년 mbc 밤의 힛트쇼 라는 순위 프로가 있었는데 고추 잠자리가 1위를 했으나 몇 주간 인지는 정확히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선 2018년 4월 21일부터 3주 간 그를 직접 전설로 모셔서 특집 방송을 했다.
- 특이하게도 노래방에서조차 본인 노래만 부른다고 한다. 실제 조용필과 노래방에 가본 연예인들의 말에 의하면 하나같이 조용필은 본인 노래만 부른다고 한다. 아예 2시간 동안 노래방에서 본인 노래만 콘서트 수준으로 부른 적도 있다고 한다.
- 2013년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그룹의 신경영 20주년 기념만찬 축하무대에 초대되어 당해 나온 신곡을 비롯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노래를 불렀다. 그 후 이건희 회장과 포옹을 하기도 했다.
- 2013년 Hello 투어는 전반기와 후반기 투어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는데, 전반기는 주로 실내 체육관이였고 후반기는 야외 경기장 중심이였다. Hello 투어를 통해 그동안 방문이 뜸했던 지역에서도 엄청난 관객을 모았다. 아마 국내에서의 전국투어 단위로는 역대 최다 규모, 역대 최고령 전국투어 기록을 또다시 조용필이 거머쥐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반기 투어가 끝나고 쉬었다가 연말에 앵콜 투어로 또 공연을 가졌다.
- 2014년에는 활동을 쉬었다가 건강회복 이후 2015년 11월부터 전국투어 공연을 다시 가진다.
- 배우 안성기와 중학교 동창으로 서로 집에도 놀러갈 정도로 절친이다. 조용필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중학교 때 같이 앉는 짝꿍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안성기 曰, '그 친구 키가 중학교 때 키 그대로'라고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중학교 동창인 안성기와 나란히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 외 구봉서와 패티 김도 받았다고 한다. 2003년 보관문화훈장 수훈 이후 개인 통산 두 번째 훈장이다.
- 꽤나 동안이다. 1950년생으로 곁에 있는 배우 안성기는 조용필보다 프로필 상 2살 연하다. 사실 젊은 시절에는 노안에 가까웠지만 이후 나이를 먹었음에도 얼굴이 거의 안 바뀌며 동안이 된 케이스.
- 유카와 마나부로 유명한 가수 겸 배우인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한국에서 제일인 가수가 조용필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비산초등학교의 교가를 작곡한 이가 바로 조용필이다. 1978년 설립 이래 교가가 없다가 조용필의 조카인 조수지가 이 학교에 재학할 당시 학교 측에서 조용필에게 교가의 작곡을 부탁했다고. 작사자는 초대 교장이었던 전정술 교장이다.
- 1953년생으로 알려진 가수 태진아보다도 3살 연상이다. 동안이다보니 태진아보다 아우가 아니냐, 태진아보고 형님이라고 불릴만 하겠다는 일설도 있으나 실제 연년상으로는 조용필이 태진아보다 3살 연상이고 태진아가 조용필 선배라고 부른다. 1952년생인 배우 이덕화, 이계인보다도 2살 연상이다. 무엇보다 상술했듯이 조용필과 함께 방송 출연이 뜸하기로 유명한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와 동갑이다.
- 엑소, 방탄소년단, BIGBANG의 음악은 물론 공연도 유튜브를 통해 접하고 있고, 외국 뮤지션으로 시아, 앨런 워커도 즐겨 듣는다고 했다. 운전을 할 때에는 차 안에서 AFKN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고 하는데, 외국의 최신 팝음악을 들으면서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 기존 곡을 O.S.T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잘 허락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사용을 허락한 영화들은 전부 천만영화에 등극했다.(택시운전사 '단발머리', 신과 함께 인과 연 '돌고 도는 인생') 게다가 18집 수록곡 '태양의 눈'을 이미지 송으로 사용했던 실미도는 한국 최초의 천만영화라는 기록을 남겼다. 뒷 사정은 31곡에 대한 저작권이 본인에게 없었던 문제도 있는데, 나중에 음반사에 넘어간 권리를 본인이 다시 찾을 수 있어서였다.
- 다만 최초로 허락을 받고 O.S.T로 사용된 곡은 단발머리가 아닌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라디오 스타)이다. 사실 천만 대박을 못 쳤을 뿐이지 나름 중박 흥행은 하고 관객 인지도도 높은 영화다. 당장 그 예능 '라디오 스타'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주연배우인 박중훈과 안성기는 이 영화로 그 해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이 곡은 허락 당시 본인에게 저작권이 없었던 31곡이 아니었으며, 동창인 안성기와의 우정 역시 영화 삽입에 한몫했다.
-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개회식 때,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가 EDM 풍으로 편곡되어서 선수단 입장곡으로 나오기도 했다.
- 계몽사의 '학습만화세계사'에 패러디되어 등장했다. 카스트 제도의 유래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수드라 계급의 할아버지와 손자가 수레를 몰고 가는데, 할아버지가 리그베다의 노래 한 구절을 부른다. 손자는 그 노래를 듣고 '가수 용피르가 부른 건가요?'라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 한창 활동하던 1980년대 당시 본인이 이끄는 밴드 인원들의 실수에 대해 대단히 엄격했다고 한다. 라디오 스타 2009년 11월 11일 방송에서 조용필과 직접적인 접점이 없는 윤종신이 조용필이 본인의 밴드 일원들에게 무서웠다는 얘기를 들은 것을 말하자, 봄여름가을겨울과 이승철이 바로 긍정을 했다. 또한, 한밤의 TV연예 2010년 03월 21일 방송에서 조용필 특집으로 출연한 유영석이 한 일화로 조용필에게 "라이브에서 틀릴 수도 있는거 아닙니까?"라고 묻자 그 질문에 대해 조용필은 "그게 무슨 프로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68년에 비틀즈 등의 팝 그룹에 빠져 살다시피 했는데, 대학 진학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을 뿌리치고 음악을 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는 말이 존재한다.
- 한때 "기도하는"으로 시작하는 비련에 관련된 일화가 인터넷에 돌아다녔는데 당시 매니저였던 최동규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조용필의 팬이라는 14살 지체장애아에게 노래를 들려달라는 의사의 의뢰를 받자 일정이란 일정은 전부 캔슬하고 그 지체장애아가 있는 병원에 찾아가 비련을 불러줬다는 일화인데, 이때 노래를 들은 아이는 처음으로 펑펑 울으며 감정을 폭발시켰고, 이에 감명한 부모가 사례비를 주며 감사를 표하자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벌었던, 또 앞으로 벌게 될 돈 보다 더 비쌉니다'라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며 최동규란 매니저와 병원에서 노래를 불러줬다는 이야기는 허구이며, 오히려 병원에 찾아가 앨범을 주거나 팬의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주는 등의 실존 일화가 와전되었던 것이다. 조용필의 소속사 역시, 뒤늦게 이런 과장된 이야기가 퍼진 것에 대해 당황했다고 한다.
- 20집은 19집이 발매된 이후 콘서트를 하면서 작업하고 있다고 하는데 신곡이 6~7개 나온 상태라고 한다. 19집과 달리 자작곡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작업이 매우 더디게 진행된데다 코로나19로 인해 베이퍼웨어가 되었다. 이후 2022년 4월 경부터 올해 안에 내는 것을 목표로 20집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온 상황이다.
- 가족오락관의 MC로 유명한 허참이 생전에 간암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3명 중 1명이었다.
5.1. 결혼
지금은 사망한 부인 안진현과 함께 찍은 사진조용필은 1984년 3선 국회의원 박찬의 딸 박지숙과 결혼하지만 결혼기간의 갈등 끝에 4년만에 합의 이혼했다.
이혼 당시 대부분 재산을 양도하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고 원만하게 이혼을 하여 별 추문 같은 게 없이 조용히 끝났다.
이후 그는 1994년 미국의 로비스트 출신인 안진현과 재혼했다.
안진현은 조용필의 음악적 삶을 존중하며 내조하고, 그는 이러한 아내에 대해 애정을 숨기지 않는 잉꼬부부의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결혼 5년만에 심장병에 걸린 안진현은 2003년 1월 투병 도중 사망하게 된다.
당시 안진현의 사망소식은 주요 언론매체에 의해 자세히 보도되었는데, 조용필은 장례를 치르는 내내 핼쑥한 모습으로 상주를 서다가 간간히 오열하는 모습 등을 보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내의 사망 이후 조용필은 상속액 전액을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였으며, 현재까지 수익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2003년 18집에 수록된 노래 '진(珍)'은 바로 아내를 그리며 작곡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조용필이 잠실운동장에서 처음 공연을 한 35주년 기념 콘서트날 공교롭게 비가 엄청나게 내렸는데 조용필은 이 노래를 부르던 말미 잠시 울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허경영이 2004년 10월엔 "가수 조용필의 부인인 안진현에게 동양화 매매대금을 받지 못했다"면서 조용필을 상대로 50만달러의 매매대금 청구 소송을 냈다.
증인이 없으니 우기면 삥 좀 크게 뜯어낼 거라고 고인을 이용해서 이런 정신나간 소송을 했지만 어차피 근거도 없고 증거도 없어서 패소했다.
이혼 당시 대부분 재산을 양도하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고 원만하게 이혼을 하여 별 추문 같은 게 없이 조용히 끝났다.
이후 그는 1994년 미국의 로비스트 출신인 안진현과 재혼했다.
안진현은 조용필의 음악적 삶을 존중하며 내조하고, 그는 이러한 아내에 대해 애정을 숨기지 않는 잉꼬부부의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결혼 5년만에 심장병에 걸린 안진현은 2003년 1월 투병 도중 사망하게 된다.
당시 안진현의 사망소식은 주요 언론매체에 의해 자세히 보도되었는데, 조용필은 장례를 치르는 내내 핼쑥한 모습으로 상주를 서다가 간간히 오열하는 모습 등을 보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내의 사망 이후 조용필은 상속액 전액을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였으며, 현재까지 수익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2003년 18집에 수록된 노래 '진(珍)'은 바로 아내를 그리며 작곡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조용필이 잠실운동장에서 처음 공연을 한 35주년 기념 콘서트날 공교롭게 비가 엄청나게 내렸는데 조용필은 이 노래를 부르던 말미 잠시 울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허경영이 2004년 10월엔 "가수 조용필의 부인인 안진현에게 동양화 매매대금을 받지 못했다"면서 조용필을 상대로 50만달러의 매매대금 청구 소송을 냈다.
증인이 없으니 우기면 삥 좀 크게 뜯어낼 거라고 고인을 이용해서 이런 정신나간 소송을 했지만 어차피 근거도 없고 증거도 없어서 패소했다.
5.2. 기부
그가 운영 중인 YPC프로덕션은 주주배당금 대신 기부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덕에 기부금액만 연평균 3억 원을 기록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있지는 않지만 기부를 엄청 많이 했다.
위에서 나와 있듯이 소속사의 주식배당금액의 일정부분을 기부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아내였던 안진현의 유산인 24억 원을 심장병 어린이 치료를 위해 기부를 했고 2009년에도 조용필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3억 원씩 기부하고 있다.
또한 콘서트 수익금 역시 매년 기부를 해 62억 원 상당의 금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기부 영웅 중에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금액은 84억 원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매스컴에 드러나기를 싫어하는 본인의 성격 탓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덕에 기부금액만 연평균 3억 원을 기록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있지는 않지만 기부를 엄청 많이 했다.
위에서 나와 있듯이 소속사의 주식배당금액의 일정부분을 기부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아내였던 안진현의 유산인 24억 원을 심장병 어린이 치료를 위해 기부를 했고 2009년에도 조용필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3억 원씩 기부하고 있다.
또한 콘서트 수익금 역시 매년 기부를 해 62억 원 상당의 금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기부 영웅 중에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금액은 84억 원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매스컴에 드러나기를 싫어하는 본인의 성격 탓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3. 영웅적 면모
조용필은 지역 최고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필은 음악이 하고 싶어서 가출을 했다.
집을 나왔다가 형한테 잡혀 들어갔다가 또 나오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유복한 가정 환경으로부터 오는 안락함, 안정감, 심지어는 가족과의 관계까지, 모든 걸 버리고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건 보통 열정이 아니다.
그리고 당시로는 대중음악 그 자체인, 프로들의 무대인 미8군에 가기까지 독기 또한 보통이 아닌 것이다.
소위 잘 사는 집 자식이면 열정이 있더라도, 어떤 순간에는 열악한 환경, 치열한 경쟁에 지쳐 결국 포기했을법 한데 그런 시련을 그대로 이겨냈다는 게 대단하다.
이 대목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끈기(독기), 그리고 결단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 1집부터(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대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2집, 3집을 꾸준히 냈다.
이 시기 언제쯤, 조용필 아버지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까지도 지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 먹는거 같다.
기자가 함 알아봐주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해당 기자가 말하기를,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 먹는 게 아니라, 아드님(조용필)은 100을 벌었다치면 90 이상을 음향장비, 악기 등에 전부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하니까 돈이 없는 겁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그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덤프 트럭을 2대씩 사서 끌고 다녔다고 한다.
최정상의 자리에서 오히려 더 나아가기 위해 음악에 그 모든 걸 재투자했다는 점이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1집부터 그런 대히트를 치는 것도 어려운데, 갑작스런 인기에도 묵묵히 재투자, 더 나은 음악을 위한 도전 등 진정 영웅적 면모를 갖춘, 타고난 슈퍼 스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후로도 나왔다하면 1등, 연말 대상이었다.
가요계는 조용필이 과장이 아니라 8할 이상이었다.
그리고 1987년, 공식적으로 연말 시상식 수상을 거부하는 결단을 보였다.
더 이상 순위에 집착하지 않고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이미 1987년 이전의 활동과 히트곡만으로도 한국역사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뮤지션이 되었을텐데, 또 한번 더 도약하기 위해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기 위해 콘서트로 본인의 주무대를 옮긴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TV는 상당히 열악한 사운드 시스템이었는데 조용필은 이에 대한 갈증과 불만이 상당했다.
뮤지션으로서 더 나은 무대, 더 나은 사운드와 퍼포먼스를 갈망한 것이다.
방송과 결별하며 그때동안 이뤄놓은 대중적 인기, 명예, 돈 모든 걸 버리고, 오로지 음악적 진화만을 추구한 결단이었다.
조용필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 뮤지션으로서의 자세가 어떠한지 또 한번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때부터는 선진화된 해외의 공연무대를 보고 분석하고 공부했다.
이때부터는 가수 조용필을 초월해 무대 총감독 역할까지도 겸하게 된다.
그전까지 국내 무대는 그저 조명 몇개 반짝반짝하고 진부한 폭죽 터뜨리기가 전부였다면 조용필 콘서트는 완전히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사운드부터가 달랐다.
모든 좌석에서 골고루 느낄 수 있는 사운드, 어떤 각도에서 보든 화려한 조명, 그리고 무빙스테이지, 어마어마한 규모. 해외의 일류 공연을 그대로 모방해왔기에 모든 게 달랐다.
음악관계자들은 물론 뮤지컬이나 연극쪽에서도 조용필의 무대를 참고하고 분석했다고 한다.
초기 몇 년은 티비에서 안보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고, 그때만해도 가수를 직접 보러 콘서트에 간다는 문화가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다.
그래서 관객이 좀 적었는데 그럴수록 더 돈을 쏟아부으며 무대에 집중, 아니 집착했다.
비로소 점점 입소문을 타고 주목을 받으면서 그 이후로 현재까지 만석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 당시에 밤무대에 나가서 노래 몇 곡을 부르면 수십 억을 준다고 했지만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현재로 치면 곡당 4~5천만원 선이다.
진정한 음악인으로 어떻게 음악을 대하는지도 알 수 있다.
최근 50주년 공연에도 무대에 3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데뷔 40주년까지 완벽한 정체성을 확립하며 활동해왔고 마침내 2013년에는 완전히 새로운, 다시 한번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가 되겠다고 19집을 내놓는다.
'Bounce'는 당시 초등학생들도 따라 불렀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런 곡이 나올 수 있었던건 아직까지도 국내 아이돌 음악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항상 듣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 작업을 수십년 해왔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트렌드나 감을 잃지 않고 EDM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단순히 한국 아이돌을 참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앨런 워커, 시아 등을 즐겨듣는다니 완전히 젊은 뮤지션과 아이돌과 경쟁하는 가수. 이 모든 것은 정상의 자리에서도 늘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자세, 자만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
돌이켜보면 조용필은 늘 새롭게 배우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민요, 판소리를 접목시킨 곡도 있고, 뮤지컬, 오페라와 접목한 노래도 있다.
한때는 뮤지컬을 하려고 하기도 했었다.
비록 그런 음반이 대히트까지는 치지 못했어도 그런 끊임없는 시도, 도전이 그를 발전시켰다.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변화, 혁신을 추구하는, 더 나은 차원으로 가려는 뮤지션으로서의 순수한 갈망이 엿보인다.
그냥 한마디로 조용필은 한 평생 음악에 미쳐있는 음악 중독자고, 음악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뮤지션이다.
그의 삶이 곧 음악이고, 음악이 곧 조용필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집을 나왔다가 형한테 잡혀 들어갔다가 또 나오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유복한 가정 환경으로부터 오는 안락함, 안정감, 심지어는 가족과의 관계까지, 모든 걸 버리고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건 보통 열정이 아니다.
그리고 당시로는 대중음악 그 자체인, 프로들의 무대인 미8군에 가기까지 독기 또한 보통이 아닌 것이다.
소위 잘 사는 집 자식이면 열정이 있더라도, 어떤 순간에는 열악한 환경, 치열한 경쟁에 지쳐 결국 포기했을법 한데 그런 시련을 그대로 이겨냈다는 게 대단하다.
이 대목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끈기(독기), 그리고 결단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 1집부터(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대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2집, 3집을 꾸준히 냈다.
이 시기 언제쯤, 조용필 아버지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까지도 지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 먹는거 같다.
기자가 함 알아봐주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해당 기자가 말하기를,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 먹는 게 아니라, 아드님(조용필)은 100을 벌었다치면 90 이상을 음향장비, 악기 등에 전부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하니까 돈이 없는 겁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그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덤프 트럭을 2대씩 사서 끌고 다녔다고 한다.
최정상의 자리에서 오히려 더 나아가기 위해 음악에 그 모든 걸 재투자했다는 점이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1집부터 그런 대히트를 치는 것도 어려운데, 갑작스런 인기에도 묵묵히 재투자, 더 나은 음악을 위한 도전 등 진정 영웅적 면모를 갖춘, 타고난 슈퍼 스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후로도 나왔다하면 1등, 연말 대상이었다.
가요계는 조용필이 과장이 아니라 8할 이상이었다.
그리고 1987년, 공식적으로 연말 시상식 수상을 거부하는 결단을 보였다.
더 이상 순위에 집착하지 않고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이미 1987년 이전의 활동과 히트곡만으로도 한국역사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뮤지션이 되었을텐데, 또 한번 더 도약하기 위해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기 위해 콘서트로 본인의 주무대를 옮긴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TV는 상당히 열악한 사운드 시스템이었는데 조용필은 이에 대한 갈증과 불만이 상당했다.
뮤지션으로서 더 나은 무대, 더 나은 사운드와 퍼포먼스를 갈망한 것이다.
방송과 결별하며 그때동안 이뤄놓은 대중적 인기, 명예, 돈 모든 걸 버리고, 오로지 음악적 진화만을 추구한 결단이었다.
조용필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 뮤지션으로서의 자세가 어떠한지 또 한번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때부터는 선진화된 해외의 공연무대를 보고 분석하고 공부했다.
이때부터는 가수 조용필을 초월해 무대 총감독 역할까지도 겸하게 된다.
그전까지 국내 무대는 그저 조명 몇개 반짝반짝하고 진부한 폭죽 터뜨리기가 전부였다면 조용필 콘서트는 완전히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사운드부터가 달랐다.
모든 좌석에서 골고루 느낄 수 있는 사운드, 어떤 각도에서 보든 화려한 조명, 그리고 무빙스테이지, 어마어마한 규모. 해외의 일류 공연을 그대로 모방해왔기에 모든 게 달랐다.
음악관계자들은 물론 뮤지컬이나 연극쪽에서도 조용필의 무대를 참고하고 분석했다고 한다.
초기 몇 년은 티비에서 안보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고, 그때만해도 가수를 직접 보러 콘서트에 간다는 문화가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다.
그래서 관객이 좀 적었는데 그럴수록 더 돈을 쏟아부으며 무대에 집중, 아니 집착했다.
비로소 점점 입소문을 타고 주목을 받으면서 그 이후로 현재까지 만석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 당시에 밤무대에 나가서 노래 몇 곡을 부르면 수십 억을 준다고 했지만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현재로 치면 곡당 4~5천만원 선이다.
진정한 음악인으로 어떻게 음악을 대하는지도 알 수 있다.
최근 50주년 공연에도 무대에 3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데뷔 40주년까지 완벽한 정체성을 확립하며 활동해왔고 마침내 2013년에는 완전히 새로운, 다시 한번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가 되겠다고 19집을 내놓는다.
'Bounce'는 당시 초등학생들도 따라 불렀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런 곡이 나올 수 있었던건 아직까지도 국내 아이돌 음악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항상 듣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 작업을 수십년 해왔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트렌드나 감을 잃지 않고 EDM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단순히 한국 아이돌을 참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앨런 워커, 시아 등을 즐겨듣는다니 완전히 젊은 뮤지션과 아이돌과 경쟁하는 가수. 이 모든 것은 정상의 자리에서도 늘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자세, 자만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
돌이켜보면 조용필은 늘 새롭게 배우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민요, 판소리를 접목시킨 곡도 있고, 뮤지컬, 오페라와 접목한 노래도 있다.
한때는 뮤지컬을 하려고 하기도 했었다.
비록 그런 음반이 대히트까지는 치지 못했어도 그런 끊임없는 시도, 도전이 그를 발전시켰다.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변화, 혁신을 추구하는, 더 나은 차원으로 가려는 뮤지션으로서의 순수한 갈망이 엿보인다.
그냥 한마디로 조용필은 한 평생 음악에 미쳐있는 음악 중독자고, 음악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뮤지션이다.
그의 삶이 곧 음악이고, 음악이 곧 조용필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5.4. 승부사적 기질, 그리고 19집
5.5. 가왕의 눈물
6. 기록
- 역대 가요대상 최다 수상자(총 12회)
- 역대 음악방송 통산 1위 횟수 2위(총 78회)
-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 보유 : 조용필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결과다. LP, 테이프, CD, 음원에서 모두 차트 1위 곡을 가진 유일한 가수다. 아쉽게도 2000년대에는 콘서트에 집중해서 정규앨범은 2003년의 'Over The Rainbow' 음반 단 한 장만 발표했으므로 이렇다 할 차트 기록이 없다.
-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곡당 1위 횟수 제한의 계기 제공(1983년) : KBS 가요톱10에서 '못찾겠다 꾀꼬리'가 10주 연속의 기록을 세우면서 나타나게 된 제도다.
- KBS 라디오 24주 1위-고추 잠자리 : 6개월 동안 1위 기록
- 인기순위 동시 최다곡 진입(20위안 TV-4곡, 연예지-6곡)
- 라디오 트롯부문/비트롯 부문 1위 동시 차지 : '타인', '마도요'
- TV가이드 1985년 12월 가요 순위에 1, 2, 3위 -최다 '최고 인기가수상' 수상
-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왕 수상 6회(1980년, 1981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 KBS '가요대상' 최고 인기가수상 수상 4회(1981년, 1982년, 1983년, 1985년)
- TBC '방송대상' 최고 가수상(1980년)
- 가수최초 명예의 전당에 등재-MBC(2000년)
- 제 1회 골든디스크상 대상(대상과 본상, 인기상을 모두 석권)-(1986년)
- 국내 최대 인파 동원한 야외 Concert-해운대 10만명 이상(1993년)
- 가수 최초 월드컵 경기장 투어-2005년(30여만 명 동원)
- 세계최초 7.2서라운드 콘서트-(2007년 12월)
- 국내 대중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홀 공연(1980년)
- 국내 대중가수 최초 공산국가 중국 베이징 공연(냉전시대, 국교 전 1988년)
- 국내 대중가수 최초 예술의 전당 'Opera hall Concert'(1999년)
- 한국가수최초 평양(북한) 류경체육관 단독공연(2005년 8월 23일)
- 국내가수 공연 최초 첨단영상 프로젝트 PIGI영상 사용
- 국내최초 모노, 스테레오, 서라운드 형식공연-예술의 전당(1999년)
- 예술의전당 개관(1993년) 이후 최고치 기록갱신-유료판매율 1위(87%)
- 예술의전당 개관(1993년) 이후 20년간 가장 높은 예매율(104%) 기록(2008년)
- 한국인 최초 범 아시아 콘서트-팩스뮤직카-(1984년~2004년간 11회)
- 국내가수 최초 (조용필) 콘서트 신탁 탄생(2008년)
-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콘서트 기록-스태프 5천 200여명, 스피커 300대, 초대형 스크린 등 잠실 주경기장 공연 횟수도 7회로 압도적(2003년 35주년 콘서트, 2005년 필앤피스 콘서트, 2008년 40주년 콘서트, 2009년 평화기원희망콘서트, 2010년 LOVE IN LOVE 콘서트 2회, 2018년 50주년 콘서트 Thanks to you)
- 대한민국 유료 콘서트 역사상 최단 기간 최다 관객을 동원한 공연-2010년 LOVE IN LOVE
- 한국 20세기 최고가수로 선정 및 수상-(설문조사 1위, 1999년)
- 광복60년 영향력 있었던 인물 1위(연예인 부문)-한국일보 & 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
- MBC 선정 정부수립 50년 최고의 스타상 '가수부문' 수상(1998년)
-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로 선정-조선일보 & 한국갤럽 조사(1998년)
- 네티즌 설문, 통일 후 북한에서도 통할 가수 1위(2000년)
- 탄자니아로부터 문화훈장 수훈 (2001년)
-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 수훈(2003년)
- 대한민국 역사 움직인 100인에 선정(문화 부문)(2007년)
- 한국 브랜드가치 설문조사 가수부문 1위(2003년)
- 과소 평가된 아티스트-여론조사 1위(2003년)
- 대한민국 100대 명반 두 장 선정-조용필 1집(29위)/조용필 7집(76위)
- M.net 레전드100 가수 종합 평가 1위-(2013년)
- 국내 최초 단일앨범 100만장 돌파(기네스 인정, 1991년)
- 국내 최초 음반 총판매량 1천만장 돌파(1994년, 1999년 현재 국내외 2천만 장 판매)
- 최초 단일앨범 100만 장 돌파-"추억의 미아"(1986년)
- 한국 최초 M7(Major Seven) 코드 사용-3집 고추잠자리(1981년)
- 한국 최초 Digital 녹음-6집(1984년)
- 일본 NHK 홍백가합전 한국가수 최초 및 연속참가(1987~1990년)
- 일본 NHK홀 외국가수 최초 Concert(1983년)
- 한국인 최초 일본에서 골든디스크상 수상(2회-1984년, 1988년)
- 국내 대중가요 최초로 교과서에 수록-친구여(5집)
- 국내 대중가요 최초로 뮤직비디오 제작-허공(8집)
- 대중가수 최초 학문연구회 발족-조용필學(Choyongpilogy)(1999년)
- 1인 1기업 최초의 가수-필기획, YPC 설립
- 한국 대중음악사 최초의 국내가수 팬클럽 '오빠부대' 탄생(자생적인 팬클럽)
- 국내 방송 CF-최초 개런티 1억원 돌파(1987년)
7. 관련 문서
- 조용필/음반 목록
- 위대한 탄생
- 조용필 오르가즘 추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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