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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인싸 (폭발,가능성,2025,주기)

by Nomangs 2023.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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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1. 개요

 

백두산(白頭山)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북한과 중국 국경에 있는 화산으로 화산의 분류 체계에 따르면 성층화산, 활화산, 초화산에 속한다.
봉우리는 총 16개, 최고봉은 해발 2,744m인 병사봉(兵使峰)으로 북한에 속해 있다.
북한에서는 장군봉으로 부른다.
중국을 통해 관광이 가능한 남한 사람은 정상에 오를 수는 없고 천지 너머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
각 봉우리 정상 사이에 칼데라 호수인 천지를 품었다.
백두산은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풍수지리에서는 한반도의 모든 산의 '조종산'으로 여겨지며, 특히 근대 이후에는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자리매김하여 남북한 양 쪽에서 특별한 상징물이 되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사실상의 영토는 휴전선 이남이지만, 정치적인 의견을 제외하면 교육이나 행정적 측면에서는 헌법의 시각을 반영하여 한국의 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2. 특징

 

 

2.1. 위치

 

북한의 량강도에 속한 삼지연시와 중국의 지린성에 속한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사이에 있다.
대한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 걸치며, 천지(용왕담) 전역은 혜산군 보천면 관할이다.
대만의 명목상 행정구역으로는 안둥성(安東省) 창바이현(長白縣)과 쑹장성(松江省) 안투현(安圖縣)에 걸친다.
천지는 창바이현 관할. 한반도 면적보다 넓은 만주 전체로 보아도 백두산 보다 높은 산은 없다.
즉, 한반도와 만주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 그렇기에 만주족의 입장에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산이다.

 

2.2. 높이

 

백두산의 높이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대한민국ㆍ북한 두 나라가 해발고도를 재는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에 측정한 방식이 현대보다는 부정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익히 아는 2,744m는 일제강점기 때 측량한 값이다.
인공위성을 활용하기 전에는 높이가 알려진 곳에서 삼각 측량으로 높이를 쟀기 때문에 현대적 기준에 따른 측량한 결과와 비교하면 오차가 있을 수 있다.
해발고도와 구분되는 기복량(起伏量)이란 개념이 있는데, 일정한 범위 안에서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의 높이 차를 말한다.
범위를 1km2로 하여 한반도 전역의 기복량을 비교하여 백두산의 기복량은 2,505m라고 밝힌 논문이 있다.
다.

 

2.3. 구조

 

 

 

3. 명칭

 

此山乃白頭山之大脉, 各䑓真身常住之地.이 산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로서 각 대(臺)는 (불보살의) 진신이 항상 머무는 땅이다.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塔像第四)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有名虎景者, 自號聖骨將軍.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左谷, 娶妻家焉, 富而無子.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고려사 권제1 세가1 고려세계玉龍記云, ‘我國始于白頭, 終于智異, 其勢水根木幹之地, 以黑爲父母, 以靑爲身. 若風俗順土則昌, 逆土則灾.’『옥룡기(玉龍記)』에서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지형지세)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그 형세가 물이 뿌리가 되고 나무가 줄기가 되는 땅으로 흑(黑)을 부모로 삼고, 청(靑)을 몸으로 삼는다.
만약 풍속(風俗)이 땅을 따른다면 창성할 것이나, 땅을 거스른다면 재앙이 내릴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려사 권제72 지 권제26 여복(輿服)1 관복, 공민왕(恭愍王) 6년(1357) 윤9월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흥필(于必興)의 상소에서慶源府西有長白山, 一名白頭山, 山凡三層, 其頂有大澤南流鶯鴨緑江, 北流爲蘇下江, 東流爲豆漫江.경원부(慶源府) 서쪽에 장백산이 있는데 일명 백두산이다.
그 정상에 큰 못(大澤)을 길러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 북으로 흘러 소하강(송화강), 동으로 흘러 두만강이 된다.
용비어천가 1권 4장의 주석조선 국경에서 멀지 않은 산림 가운데 태백산, 즉 백두산이 구름 위에 솟아 있습니다.
이 산은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청조(淸朝)의 시조인 한왕(汗王 누르하치)의 탄생지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유명합니다.
그 산 서쪽 비탈에는 그의 옛 집이 보수되어 보존되는데, 중국인들은 그곳을 종교적 예배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아주 먼 지방에서 경건한 순례자들이 와서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조아립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페레올 고 요한 주교에게 보낸 편지 中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로, 신라 명주 오대산을 백두산의 줄기로 소개하는 기사가 2차례 등장한다.
『고려사』 세계와 성종 10년(981)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그 이전 기록의 경우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태백산'을 지금의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는 편이다.
단군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을 무대로 언급한다.
대체로 10세기 후반부터 백두산이라 불렀다고 추정하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편지에서 보듯 19세기까지도 태백산이라는 이름이 쓰이기도 한 모양이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백두산 이외에도 장백산을 혼용했다.
용비어천가에서도 장백산이라고 언급하며 '백두산'은 별칭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장백산이 백두산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온다.
게다가 북한 김일성장군의 노래도 첫 소절이 장백산으로 시작한다.
2007 창춘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이 이 사실을 몰랐는지 중국 측 편파판정과 장백산이란 표현에 반발하여 우발적인 세리머니를 하여 중국 측과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의 이모저모 부분을 참고할 것.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설명할 때는 환웅이 자리잡은 태백산에 '묘향산을 이른다'는 주석을 달았으나, 고구려 건국 신화 부분에서 동부여 왕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난 부분에서는 태백산에 특별한 주석을 달지 않았다.
다만 고구려=졸본부여라 하면서 졸본을 요동 인근으로 비정했는데, 지리적인 상황으로 보아 학계에서는 백두산으로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안도에 있다고 나오나, 이는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추정하여 적은 것이기 때문에 부여의 실제 위치인 만주 지역하고는 맞지 않는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처음부터 태백산이라고만 적고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았다.
부여, 옥저, 신라, 고례(高禮), 예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보는 동시에, 이승휴 자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요하 근처의 무덤을 현지인들이 '부여 부마 대왕의 무덤'이라고 증언하는 것과, 요하 인근을 부여의 땅으로 기록하고 부여가 후조선의 후예라고 기록한 가탐의 기록을 실어놓아 요하 일대와 백두산을 부여 영토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일연이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단 데에는 백두산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설(서대석 교수의 주장), 묘향산이 불교의 성지라서 그 영향을 받았다는 설,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백두산 신앙의 요소가 묘향산으로 이동한 것을 반영했다는 설(최남선 주장),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으로 이동하면서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면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단군 문서 참고.북한의 평양 단군릉 발굴 및 개건과 남한 이승만 정권의 단기 사용, 대종교의 단군 숭배와 백두산 성역화, 단군 동상 설립 등이 한국인의 단군 숭배를 보여준다.
백두산에 관련된 신화는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족, 특히 청나라에서도 나타난다.
만주족의 기원 신화의 중심지 또한 백두산이며 청나라 시절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서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사실 전통적으로 한민족보다 만주족에게 훨씬 더 중요한 산이었다.
중국에서는 산해경의 기록에선 불함산(不咸山)으로,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221∼589)에는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등 여러 이명으로 불렸다.
현대에는 '창바이산(長白山)'이라고 통일되었는데, 이는 만주어로 '긴 흰 산', '큰 흰 산'이라는 뜻인 '골민 샹갼 알린(Golmin Šanggiyan Alin)'을 번역차용한 것으로, 요나라, 금나라 시기부터 쓴 이름이다.
이러한 명칭은 9개월 가까이 눈이 쌓인 특색 있는 산정의 모습을 잘 반영했다.
이 만주어 명칭은 조선 영조 때 학자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地行錄)에 '가이민 상견 아린(歌爾民 商堅 我隣)'이란 음차로도 기록되어 있다.
음차일 뿐인데 굳이 한자의 훈을 억지로 끼워 맞춘 해석인 '그곳 백성(爾民)이나 장사꾼(商)이 노래하는(歌) 굳센(堅) 우리(我) 이웃(隣) 산'이란 말이 웹상에 떠돌지만, 이는 지행록 역자의 오류인 듯. 지리지인 성경통지(盛京通志)에도 "'歌爾敏(가이민←골민)'은 '크다(≒길다)'는 뜻이고 '商堅(상견←샹기얀)'은 '희다'는 말이며 '阿隣(아린←알린)'은 '산'을 말하는 만주어"라고 설명했다.
즉 현대 중국이 사용하는 '장백산'이라는 표현은 한족(漢族)의 용어가 아니다.
'장백산', '백산'은 우리나라가 백두산을 지칭하며 사용한 명칭이기도 하다.
10세기 무렵부터는 중국에서 대부분 장백산, 백산이란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시기 고려에서도 장백산이란 명칭으로 많이 불렀고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지금의 백두산이란 명칭은 그 전에도 쓰이긴 했지만 조선 말기에나 빈도가 높아진다.
일본 NHK에서 북한 측의 협력을 얻어 백두산 일대의 식생을 50분짜리 자연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적이 있는데, 여기서 볼 수 있는 백두산은 그야말로 '희고 긴 산'이다.
한국측 미디어에서 대개 백두산 천지를 그려내는 데 비해 이 다큐는 삼지연 일대의 자연을 담고 있어서 밑에서 올려다보는 백두산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영어권에서는 백두산이란 이름을 중국식으로 읽어서 'Baitou Mountain'이라고 하기도 한다.
한편 '밝달뫼'라는 명칭으로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른바 순우리말 달의 이름이라고 도는 이름 가운데 10월이 하늘연달(개천절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단 공식 표기는 북한의 표기인 Mt. Paektu.다.

 

3.1. 병사봉

 

백두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이름은 병사봉(兵使峰)이다.
북한에서는 장군봉이라고 하는데, 장군봉이라는 작명을 한 사람은 김정일. 1963년 8월 백두산 방문 때 백두산 최고봉 이름이 병사봉임을 알고 "수령님은 백두산이 낳은 장군님이신데 제일 높은 봉우리가 병사봉일 수는 없다.
장군봉으로 고치게."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항간에는 원래 이름이 장군봉이었는데 일제가 비하할 목적으로 병사봉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정작 일제가 붙인 이름은 대정봉(大正峰)이었다.
그런데 백두산의 병사봉은 병사(兵士)가 아니라, 지금의 사단장-군단장 급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줄여 말하는 것이다.
남북한 모두 더 이상 한자를 널리 쓰지 않는 이상 동음이의어 표기의 오해 여지가 있을 수 있기에 아예 명확한 의미인 장군봉으로 바꿨을 수도 있으나, 여기에 김일성의 항일투쟁 우상화를 반영하였으므로 차후 통일되면 표기 변경과 관련하여 고민해 봐야 할 듯하다.
다.

 

4. 역사

 

한민족의 영산으로, 지금도 한국의 국가와 북한의 국가에 모두 등장한다.
백두산을 영산으로 중요시함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오대산을 설명하며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에는 진신이 늘 있는 곳이다.
"()라고 기록한 부분이 있어 이미 신라 때부터 한반도 산줄기의 근본 기준이자 신앙대상으로서 백두산을 꽤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행교과서상으로 고려 왕조 당시에는 말갈/여진의 땅이었기 때문에, '아주 멀리 있는 산맥의 기원'이라는 의미 이외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다만 고려사 묘청열전 인종 9년(1131)조에 묘청이 건의하여 서경(평양)에 팔성당(八聖堂)을 세웠는데, 거기서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는 신격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고, 12세기 중엽 고려 의종 대에 쓰인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왕건의 조상인 호경이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한동안 백두산이 자국의 기원과 관련된 중요한 산이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초에는 태종 14년(1414) 이전 어느 시점부터 제사 지낸 것을 이어받아 중사(中祀)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나(태종실록 14년 8월 신유), 세종 19년(1437) 자국 영토에 있지 않다고 하여(기록) 제사 대상에서 제외했다(세종실록 19년 3월 계묘). 이후에도 조선은 '백두산 자체는 우리 땅이 아니긴 한데, 백두산 남쪽은 당연히 우리 땅이고 우리나라 산맥은 백두산에서 기원함'이라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인식을 가장 잘 체계화한 책이 신경준의 산경표인데, 이 책에서부터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이후 영조 37년(1761)부터 백두산이 조선 산맥의 근본이 된다는 이유로 제사를 지내자는 건의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검토 단계에서 숙종 때 청이 목극등을 보내 확정한 경계가 백두산으로부터 남쪽이라는 이유로 백두산 대신 백두산 맞은 편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영조실록 43년 윤7월 신축).이때 영조의 발언은 굉장히 정치적이다.
목극등이 지은 경계선 이야기를 다 듣고도 '용비어천가 보니까 우리 조상님(이안사) 집이 경흥에 있었다는데 거기 백두산 근처 아니냐? 야 아무리 봐도 백두산 우리 땅 같은데? 야 그럼 우리나라 땅이니까 제사 지내야지?'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갔다.
물론 두만강 하구에 있는 경흥은 백두산과는 300km 가까이 떨어졌으니 시작부터 뭔가 이상한 소리. 당연히 조선에 청나라에 맞서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칭제건원 얘기가 나올 정도였던 이 무렵 조선 내부의 고양된 분위기에 맞춰 백두산 남쪽 국경지대의 처우를 높여준 것에 가깝다.
실제로 이 발언과 무관하게 백두산 망제를 지내는 장소는 백두산 남쪽의 녹반치(綠礬峙)로 정했다.
이후 1880년대부터 이른바 간도 지역을 두고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면서 백두산 인근 지역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졌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고 칭제건원하면서 황제국의 전례에 따라 오악(五岳)을 설정할 때에 백두산을 북악으로 지정하여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영산으로 삼았다.
현재는 북한과 중국이 절반씩 나눠서 관리한다.
중국에서는 중국5A급여유경구로 지정하였다.
그래서인지 입장료는 125위안으로 비싸다.

 

5. 국경선

 

북한 지역 영토관할권 분쟁 지역
백두산 영토주권
백두산
두만강 영토주권
녹둔도
간도 영토주권
간도

 

6. 자연과 기후

 

높은 위도와 고도로 인해 이 산의 정상부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9월 하순부터 6월 상순까지가 겨울이며, 최한월인 1월 평균 기온은 약 -25℃, 최난월인 7월 평균 기온은 7.8℃로 시베리아와 비슷한 기온 분포를 보이며, 강수량은 1,500mm 정도로 많다.
1943년 1월에 비공식적으로 백두산 정상에서 -47.5℃가 기록된 바 있고, 1997년 1월 2일에는 비공식적으로 무려 -51.0℃가 관측되기도 했으며, 비공식이지만 백두산 정상 일원에서 -54.7℃가 기록된 적도 있다.
공식적인 한반도 역대 최저 기온은 1933년 1월 13일 평안북도 중강군의 -43.6℃이다.
백두산 정상에 한정하면 한반도를 통틀어 유일하게 한대기후의 툰드라와 가까운 기온을 보이는 지역이다.
다만 사실 이렇게 고산 지역에서 나타나는 추운 기온대는 고산기후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두산의 날씨는 눈, 구름, 안개, 폭우, 강풍, 혹한 등이 일반적이며, 연중 변화무쌍해서 쾌청한 날씨를 찾아보기 힘들다.
9월 하순부터 다음해 6월까지 겨울로 9월 상순에 눈이 내린 적도 있다.
그리고 6월 중하순~9월 초중순까지 약 3개월 동안만 봄/가을이며 여름 없이 추분부터 겨울로 넘어간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기상이 급변하고 구름에다 안개로 가려져 백두산의 전경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날씨 좋은 타이밍에 맞추어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행운이라 여길 정도다.
여름에도 갑작스럽게 기온이 낮아져 방풍복을 준비해야 한다.
기온은 연 평균 -6~8℃, 아무리 높아도 최고 18~20℃이며, 연중 눈,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 일,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다.
겨울 날씨가 1년 중 230일이다.
6월 초까지 눈에 덮여있는 백두산 등정은 한여름 장마철보다 6월 말에서 7월 초, 8월 말에서 9월 초가 적당한 시기이다.
실제로 평양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등 일행이 천지를 방문했을 때는 쾌청했으나 늦가을 날씨(!)였으며, 그 다음에 김정은이 10월 중순 천지를 다시 방문했을 때는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사진이 북한 매체에 등장 했다.
백두산이라는 이름답게 정상 부분에 화산재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용결 응회암층이 있다.
현지 가이드들은 '백 번 올라서 두 번 천지를 보기 어렵다'고 지어졌다는 농담을 한다.
사실 고산 지역인 특성 상 구름이 끼거나 하면 보기 매우 힘든데, 아침엔 맑던 것이 정오 지나고 눈이 온다거나 하는 일이 잦다.
칼데라 호수인 천지가 정상에 있으며, 이 천지의 수량은 20억 톤이라는 양을 자랑한다.
천지의 수량이 이렇게 많다는 건 문제가 되는 게, 화산이 분화할 때 인근 지역에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화산재해 중 하나인 화산이류(라하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천지는 천여 년 전인 10세기 무렵 폭발로 형성된 것이다.
백두산이 천여 년 전에는 높이 3,500m 정도였고 폭발하면서 오늘날 모습이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 폭발은 천여 년 전이 아닌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이고 천여 년 전에는 주로 부석을 분출했다.
백두산에 안 가 본 사람들은 백두산이 후지산처럼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 형태라고 생각하지만, 백두산은 후지산과 달리 개마고원이 있고 주변에 2,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막연한 상상과는 상당히 다르다.
백두산은 옛 분화로 흘러나온 마그마가 사방으로 흘러내려 이룬 용암대지에 있기 때문에, 높이보다는 산의 밑동이 거대하다.
백두산이 천여 년 전에는 높이 3,500m 정도였고 폭발하면서 오늘날 모습이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 폭발은 천여 년 전이 아닌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이고 천여 년 전에는 주로 부석을 분출했다.

 

6.1. 동물상

 

그야말로 한반도 동물상의 정수만을 모아놓은 듯한 화려한 동물상을 자랑한다.
한반도 북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동물들이 많이 서식한다.
검은담비, 반달곰, 스라소니, 와피티사슴, 몽골늑대, 우수리불곰, 붉은여우 등. 조류로는 멧닭, 긴꼬리올빼미, 세가락딱다구리가 서식하고 양서류, 파충류도 북살무사 등 남한에서 찾아보기 힘든 종류가 많고 곤충 고유종도 풍부하다.

 

6.2. 천지 괴수

 

천지에는 괴수가 산다는 소문이 있다.
증언에 따르면 네스호의 괴물을 닮았다고 하고, 머리가 황소를 닮았다는 카더라도 있다.
의외로 오래전부터 목격담이 존재한다.
산해경 17권에 백두산에 산다는 괴생물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有蜚蛭 四翼 有蟲 獸首蛇身名曰琴蟲대황(大荒)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不咸)이라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에 있다.
비질(蜚蛭)이 있는데 날개가 넷이다.
짐승 머리에 뱀 몸통을 한 것이 있는데 이름을 금충(琴蟲)이라 한다.
위의 그림이 백두산에 산다고 산해경에 나오는 괴수 금충(琴蟲). 하지만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사람 곽박(郭璞 276-324)이 산해경에 주석을 달며 금충을 '뱀의 일종'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했고, 산해경 자체의 서술 또한 흔히들 생각하는 '천지에 서식하는 거대생물'이 확실히 아니다.
머리가 특이하게 생긴 뱀이었을 것이다.
북한 당국이 1960년에 산천어를 천지에 푼 이후 산천어가 번식함을 확인하였다.
천지가 물이 맑고(먹잇감이 없고) 차가워서 산천어를 풀어도 그 안에서 살기 어려우리란 평이 지배적이었으나, 결과를 보면 산천어가 살기 매우 좋은 환경인 듯. 천지에 사는 산천어는 몸집도 다른 곳에 사는 산천어보다 훨씬 크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천지에 사는 괴수란 것이 산천어를 잘못 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관련기사천지의 바닥에 있는 부석이 천지 밑에서 뿜어나오는 이산화탄소를 받아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괴수로 보였다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뿐 아니라 백두산 근처에 사는 곰이나 새가 헤엄치는 광경을 괴물이라고 오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마도 한 가지 이유는 아니고 이 모든 요소가 다 합쳐져서 '천지에 사는 괴물'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백두산이 946년에 대폭발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분출한 적이 있으므로, 천지에 거대한 괴물이 산다는 소문은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는 헛소문에 불과하다.
천지에 정말로 괴물이 살았다 해도 이런 화산 폭발 때문에 이미 옛날에 죽어버렸을 것이다.
천지에서 물이 밖으로 흐르는 곳은 천지 북쪽에 있는 조그만 협곡 '달문'밖에 없다.
천지의 물은 달문으로 흘러내려 장백폭포와 이도백하를 거쳐 송화강에 도달한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거대한 괴물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946년 대분화가 그치고 백두산이 식은 뒤에 이도백하를 거슬러 올라와 낙차가 68미터나 되는 장백폭포를 뛰어넘어 먹을 것도 없는 천지에 터를 잡았다는 뜻이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7.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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