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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펠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검색하는 이유 및 소개 (저주,나이,근황,건강)

by Nomangs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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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

뉴욕 코스모스 명예 회장
이름
펠레
Pelé
본명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
Edson Arantes do Nascimento
출생
1940년 10월 23일 (82세)
브라질 합중국 미나스제라이스 주 트리스 코라송이스
국적
 
브라질
 
신체
173cm
주발
양발
등번호
10번
포지션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소속팀
바우루 AC (1952~1956 / 유스)
산투스 FC (1956~1974)
뉴욕 코스모스 (1975~1977)
통산 득점
757골
국가대표
92경기 77골 (브라질 / 1957~1971)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상술되어 있듯 '펠레'로 알려진 그의 이름은 별명이다.
아버지 돈지뉴의 친구였던 골키퍼 "빌레(Bilé)"를 어린 펠레가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고 "펠레"로 발음해서 생긴 별명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고,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1977년에 발간된 펠레의 자서전에서조차 펠레라는 별명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적혀 있었고, 한참 후인 2010년 10월 경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는 펠레 본인이 이와 같이 밝혔다.
참고로 빌레는 포르투갈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적이라는 뜻이고 펠레는 흑진주라는 뜻으로 붙여진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자신의 별명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펠레가 살던 골목의 동네 친구들이 그를 펠레라고 부르며 놀려 대기 시작했고, 펠레는 그 때문에 친구들과 싸우기도 했다.
펠레의 원래 이름인 이지송(Edison)은 아버지 돈지뉴가 지어준 이름인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붙여준 것이다.
이는 돈지뉴가 에디슨을 존경하여 그와같이 위대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인데, 이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던 펠레는 이지송이라는 이름을 무지 사랑해서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던 주위 사람들과 자주 다툰 것이다.
덧붙여 돈지뉴는 펠레의 이름을 호적에 올릴 때 i자를 빼고 "이드송(Edson)"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서류 절차상 실수가 생겨서 기록상으로는 이지송이 되었다.
어찌저찌 펠레란 별명이 굳어져버렸고 학교에서도 그를 펠레라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학교에서도 싸웠고 이틀간 징계를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급기야 아버지까지 그를 펠레라 부르게 되자 그걸로 게임 끝. 후에 스타가 된 후 그는 펠레란 이름을 신이 주신 이름이라며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펠레의 가족들은 그냥 이지송의 애칭인 지쿠(Dico)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브라질의 흔한 빈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준프로 선수로 뛰었는데, 보잘것 없는 선수 수당 때문에 시간제 근무까지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
펠레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헤딩 실력만큼은 더 뛰어났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선수 생활 시절 헤딩으로만 5골을 넣었던 적도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상대 팀과의 경기 도중 강한 태클로 무릎이 부서지는 끔찍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하지만 펠레의 아버지답게 기어코 재활에 성공했고 시청에서도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펠레의 가족은 바우루로 이사하였고, 펠레도 축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공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축구를 좋아했으며, 파일럿을 비롯한 여러 장래희망을 갖기도 했고, 가끔 무서운 일이 생기면 어머니에게 응석도 부리는 약간 소심할 뿐인 평범한 아이였다.
당시의 펠레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멘토는 아버지 돈지뉴였는데, 아버지는 자신이 못 이루었던 꿈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그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만들고자 하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노하우를 펠레에게 전해주었다.
축구 선수로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스킬과 마음 가짐은 물론이고 심지어 관중을 다루는 법까지 가르쳤다.
펠레가 10살이 되던 해에, 브라질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났다.
당시 펠레는 라디오로 경기 중계를 듣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서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킬 것을, 그리고 우루과이에 복수할 것을 예수상 앞에서 맹세한다.
자서전에 보면 예수상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다고 나와 있다.
펠레는 실제로도 신앙심이 매우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우루 AC 유소년 팀 계약을 맺는 펠레그렇게 펠레는 동네에서 축구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한편 아버지 돈지뉴의 전 소속팀이었던 바우루 AC에서 유소년 팀을 만들면서 그 코치로 위대한 멘토 바우데마르 지브리투를 데려왔다.
그리고 펠레는 바우루 AC의 지브리투의 소개로 상파울루 주의 떠오르는 강호, 산투스 FC 유소년팀에 들어가게 된다.
산투스 FC는 당시 지투, 페페 등 젊은 선수들을 바탕으로 스쿼드를 재정비하던 팀이었다.
산투스 유소년팀에서 훈련을 받던 펠레는 2번이나 무단 이탈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의 왜소한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 다른 한 번은 4살이나 어린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페널티 킥을 실축하였을 때였다.
펠레는 유소년 팀에서 이탈하려고 할 때마다 팀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허드렛일을 하던 사부라는 친구에게 걸려서 다시 숙소로 되돌아갔다.
이 사부라는 인물은 멘탈이 완전히 깨진 펠레를 잘 달래서 다시 축구에 전념하게 만들도록 도와준 인물이다.
작은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는 "네가 바우루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거다.
만약 지금 먹는 속도대로 계속 먹다보면 조만간 너는 산투스 제일의 뚱보도 될 수 있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펠레의 가방을 빼앗아 다시 방 안에 던져 넣었다.
페널티 킥 실축 사건 때 사부는 대뜸 펠레의 방에 쳐들어갔다.
펠레가 울면서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을 보자 사부는 좋은 구경했다는 식으로 펠레의 속을 긁었다.
펠레가 페널티 킥 놓친 걸 말하느냐고 답하자 사부는 "맞다.
그런 식으로 페널티 킥 날려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 라고 말했고, 펠레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하지만 사부는 침착하게 "네가 롤모델로 삼고 있을 산투스의 스타 플레이어들도 연습이든 실전이든 페널티 킥 엄청나게 실축하던 거 내가 다 봤다.
누구나 다 하는 실수니까 풀 죽을 필요 없다.
"라고 말하며 화나 있던 펠레를 달래주었다.
사부는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해 허드렛일만 많이 했을 뿐이지 매우 지혜롭고 설득도 잘 하는 인물이었는데, 사부의 진심어린 설득 덕분에 축구 황제 펠레가 다시 힘을 얻은 것이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펠레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도망쳐왔는데, 지브리투 코치가 집까지 찾아와서 끌고 갔다고 한다.

 

2.2. 선수 경력

 

펠레의 축구 선수 경력에 대해서 서술한다.

 

2.3. 은퇴 이후

 

펠레는 축구 선수 은퇴 이후 부패로 얼룩진 브라질 축구계와 대립했다.
이후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브라질 축구계를 정화하는 대규모 개혁을 시도하는 등 축구 협회와 클럽들의 회계를 투명화하려 노력했으며,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도 힘을 썼다.
관련 네이버캐스트2021년 12월 기준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역대 최다 득점자(1283골)" 문구가 있는데 이는 실제 기네스 등재 기록이며 비공식적 기록이다.

 

2.3.1. 투병

 

2015년에는 노환이 찾아왔고, 각종 수술 후유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질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이 때문에 우울증까지 찾아왔지만 바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2020년에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폐와 간에도 종양이 발견되어 항암 치료 중이다.
2022년 들어서 요로감염으로 입원했다.
2022년 12월 3일, 브라질 언론사 FOLHA에선 펠레는 더 이상 항암치료에 반응하지 않으며 임종치료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고령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그의 생애가 막바지를 달려가고 있는 것이 확실시되기에 현재 카타르 월드컵을 치르는 중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겐 자국의 월드컵 3회 우승의 주역이자 축구계 GOAT를 위한 우승 동기부여가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 세계의 축구 팬들은 8년 전 사망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6년 전 사망한 요한 크루이프, 2년 전 사망한 디에고 마라도나에 이어 또 다른 올타임 레전드를 보내줄 준비를 해야 한다며 슬퍼하고 있다.
킬리안 음바페 역시 트위터에 응원의 글을 남겼다.
이에 대해 본인은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
내가 에너지로 가득 찰 수 있게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난 카타르 월드컵 브라질의 경기도 볼 것이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며 아직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음을 피력했다.
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 산투스 FC (1956~1974)타사 브라지우: 1961, 1962, 1963, 1964, 1965,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1968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58, 1960, 1961, 1962, 1964, 1965, 1967, 1968, 1969, 1973토르네이우 리우-상파울루: 1959, 1963, 1964, 1966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62, 1963인터컨티넨탈컵: 1962, 1963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968
  • 타사 브라지우: 1961, 1962, 1963, 1964, 1965,
  •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1968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58, 1960, 1961, 1962, 1964, 1965, 1967, 1968, 1969, 1973
  • 토르네이우 리우-상파울루: 1959, 1963, 1964, 1966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62, 1963
  • 인터컨티넨탈컵: 1962, 1963
  •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968
  • 뉴욕 코스모스 (1975~1977)NASL: 1977사커보울: 1977
  • NASL: 1977
  • 사커보울: 1977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 1958, 1962, 1970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959
  • FIFA 월드컵: 1958, 1962, 1970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959

 

3.2. 개인 수상

 

  • FIFA 발롱도르 명예상: 2013
  • FIFA 월드컵 실버슈: 1958
  • FIFA 월드컵 베스트 영플레이어: 1958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58, 1970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FIFA 100: 2004
  • FIFA 세기의 선수: 2000
  • FIFA 공로장: 1984, 2014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1959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득점왕: 1959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73
  • 타사 브라지우 득점왕: 1961, 1963, 1964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9, 1973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 1965
  • 인터컨티넨탈컵 득점왕: 1962, 1963
  • NASL 올스타팀: 1975, 1976, 1977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FWA 공로상: 2018
  • 볼라 지 프라타: 1970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세계 베스트 XI: 1970
  • 타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1999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 BBC 올해의 해외 스포츠 스타: 1970
  • BBC 올해의 운동 선수 평생 공로상: 2005
  • 로이터 20세기의 운동 선수: 1999
  • IOC 20세기의 운동 선수: 1999
  • IFFHS 20세기의 선수: 1999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브라질 드림팀: 2021
  • 아스 역대 베스트 XI: 2021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

 

3.3. 수훈

 

  • 대영제국 훈장 2등급 (KBE): 1997

 

3.4. 개인 기록

 

  • 한해 최다골 : 1959년 127골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우승: 3회 (1958, 1962,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신인상 (1958, 17세)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득점: 2경기 3골 (1958, 1970)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도움: 3개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공격포인트: 2경기 3골 3도움 (1958,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공격포인트: 14경기 12골 10도움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도움: 14경기 10도움 (1958, 1962, 1970)
  • FIFA 월드컵 통산 단일 대회 최다 도움: 6경기 7도움 (1970)
  • FIFA 월드컵 통산 단일 대회 토너먼트 최다 득점: 6골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해트트릭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우승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결승전 출전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결승전 득점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2회 우승 (1962, 22세)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프리킥 골이자 유이한 두 대회 연속 프리킥 골 2골 (1966,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연속 대회 득점 4대회 (1958, 1962, 1966, 1970)
  • FIFA 월드컵 역사상 유일하게 10-10(10골 이상, 10도움 이상)을 달성한 선수
  • 코파아메리카 통산 역대 최연소 득점왕 (1959년 만 18세 6개월 6경기 8골)
  • 코파아메리카 통산 역대 최연소 MVP 수상 (1959년 만 18세 6개월)
  • 축구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과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모두 3골 이상 득점하고 우승한 선수
  • 인터컨티넨탈컵 통산 최다 득점 3경기 7골 (1962, 1963)

 

3.4.1. 클럽

 

시즌
클럽
소속리그
주립 리그
히우
상파울루

전국 대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인터컨티넨탈컵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56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0
0
x
x
x
x
x
x
x
x
0
0
1957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9
36
9
5
x
x
x
x
x
x
38
41
1958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8
58
8
8
x
x
x
x
x
x
46
66
1959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2
45
7
6
4
2
x
x
x
x
43
53
1960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0
33
3
0
0
0
0
0
0
0
33
33
1961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6
47
7
8
5
9
0
0
0
0
38
64
1962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6
37
0
0
5
3
4
4
2
5
37
49
1963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22
8
14
4
5
4
5
1
2
36
48
1964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1
34
4
3
6
7
0
0
0
0
31
44
1965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0
49
7
5
4
2
7
8
0
0
48
64
1966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4
13
0
0
5
2
x
x
0
0
19
15
1967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8
17
x
x
14
9
0
0
0
0
32
26
1968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1
17
x
x
18
12
0
0
0
0
43
29
1969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5
26
x
x
12
12
x
x
0
0
40
40
1970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5
7
x
x
13
4
x
x
0
0
28
11
1971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8
x
x
21
1
0
0
0
0
40
9
1972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0
9
x
x
16
5
0
0
0
0
36
14
1973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11
x
x
30
19
0
0
0
0
49
30
1974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0
1
x
x
17
9
0
0
0
0
27
10
19시즌
합계
412
470
53
49
174
101
15
17
3
7
657
644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포스트 시즌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75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9
5
x
x
9
5
1976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2
13
2
2
24
15
1977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5
13
6
4
31
17
3시즌
합계
56
31
8
6
64
37
22시즌
클럽 커리어 통산
-
721
681
  • x표는 참가 자체가 불가능했던 경우

 

3.4.2. 국가대표

 

소속 대표팀
연도
경기
득점
브라질
1957
2
2
1958
7
9
1959
9
11
1960
6
2
1961
0
0
1962
8
8
1963
7
7
1964
3
2
1965
8
9
1966
9
5
1967
0
0
1968
5
4
1969
9
7
1970
15
8
1971
2
1
통산
91
77

 

4. 플레이 스타일

 

 

 

4.1. 드리블

 

 

 

4.2. 득점력

 

 

 

4.3. 패스와 기회 창출

 

 

 

4.4. 수비

 

 

 

4.5. 그 외

 

 

 

5. 평가

 

 

5.1. 위상

 

 

 

5.2. 관련 논쟁

 

펠레가 일단 최고의 선수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수십년 전의 선수인 만큼 여러 의문점과 비판 또한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아래는 이와 관련해 펠레를 다방면에서 보고,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한 서술이다.

 

5.2.1. 주요 경기 활약상

 

월드컵 결승전 통산 공격포인트역대 월드컵 통산 공격포인트 순위중요 경기에서의 활약도 또한 역대 최고였다.
각종 대회 결승전에 출전하면 스타 본능을 발휘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주인공이 되곤 했다.
펠레가 커리어 내내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통틀어 출전한 결승전은 총 14회인데 단 2번을 제외하면 모두 소속팀에 우승을 안겨주었고, 본인은 총 23경기 동안 29골을 넣었다.
그 안에는 FIFA 월드컵 결승전 2경기의 3골도 포함되는데, 이는 바바, 지네딘 지단, 제프 허스트와 더불어 갖고 있는 월드컵 결승전 개인 최다 득점 기록이며 도움 3개까지 포함한다면 월드컵 결승전 최다 공격포인트 기록은 펠레가 갖게 된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3경기 3골 2도움, 인터컨티넨탈컵 3경기 7골 2도움 등 다른 주요 결승전에서의 활약상들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대륙 레벨 이상의 결승전들을 종합하면 8경기 13골 7도움으로 경기 당 2.50공격포인트라는 엄청난 기록도 남기게 된다.
더 나아가 월드컵 결승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클럽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3골 이상을 넣어본 선수는 축구 역사에서 펠레가 유일하다.
국가대표에서는 A매치 77골 중 유럽, 남미 국가가 71골로 그 비율이 무려 92%이며 그 상대국들은 대부분 유럽, 남미 중에서도 강호에 속한다.
당시 브라질은 친선 경기도 주로 남미 국가들, 유럽 상위 국가들과 잡았고 월드컵도 16개국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데다, 아시아, 아프리카, 북중미 같은 상대적 약체 대륙들에게 티켓을 1장 이하로 배분했기 때문에 강팀들 밖에 상대할 수 없었고, 강팀 상대 득점 비율도 매우 높았다.
또한 이제 100년 가까이 되어가는 월드컵 역사에서 10골 이상과 10도움 이상을 동시에 달성한 선수는 펠레가 유일하다.
토너먼트로 한정해도 출전한 6경기에서 모두 공격포인트를 기록했으며 도합 7골 5도움으로 경기 당 평균 2개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다.

 

5.2.2. 전술

 

자료 출처: 광개토TV펠레의 위상과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자 낮은 평가를 내는 의견들의 대표적인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펠레가 뛰었던 시대와 현 시대의 단순 골 기록 비교는 큰 무리가 있다.
당시 유럽 주요 리그의 경기 당 평균 득점은 1970년대 이후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았다.
1970년대 이전은 토탈 풋볼 붐 이전이기 때문에 선수들의 뛰는 거리가 지금의 두 배 가까이 적었다.
지역 방어 개념이었고, 압박이 비교적 적었다.
이로 인해 수비수의 개인 기량만이 수비의 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아 골이 많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70년대에 들어서고 축구판에는 토탈 풋볼의 바람이 불면서 고도의 압박 전술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자료 출처: 광개토TV브라질 리그 역시 그런 경향이 나타났는데, 펠레 또한 수비 전술이 발달한 축구판에서 전과 같은 득점력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60년에서 70년대로 갈수록 브라질 리그의 수비력 수준이 상향되는 것에 반비례해서 펠레의 득점이 적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브라질 리그 평균실점이 3.66에서 1.91까지 절반 가까이 떨어지는 동안 펠레의 경기 당 득점은 1.63에서 0.37까지 80%가량 심하게 떨어졌다. 노쇠화와 부상으로 인한 신체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펠레가 전과 같지 않은 득점력을 보였고, 마침 수비 전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가 자신의 최전성기였고 (1959-1965년), 더 많은 득점 기록을 세우는데 이득을 본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위는 득점 기록에 대한 비판이고 이걸로 펠레의 실력 자체가 현대에서 뛰면 뒤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하는 건 섣부르다.
과거 축구에서 득점 난이도가 쉬웠다는 것과 펠레의 전술 이해력은 별개의 문제다.
당시 브라질의 1970년 월드컵 대표팀의 공격수들 펠레, 토스탕, 자일지뉴, 호베르투 히벨리누 네 명은 다른 공격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기는 했지만 모두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선수들이었는데, 이들 중 4-2-4에서 전방 플레이메이커(10번) 역할을 맡을 선수로 펠레가 선택되었다.
이 위치는 파트너 스트라이커(토스탕)와는 다르게 단순히 공격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내려와 미드필더들을 지원하고, 수비에도 가담하는 전체적인 경기 조율의 역할을 맡는다.
공격수의 수비 가담 즉, 위에서 펠레의 기록을 비판할 때 이야기한 토탈 풋볼의 이론 일부를 먼저 구현했다는 말이 된다.
기술 뿐만 아니라 포지션의 단조로운 역할에서 벗어나 유기적인 플레이가 가능한 축구 지능도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위에서 올려진 펠레의 수비 영상이나 인터넷에 도는 펠레의 볼터치 영상들을 보면 그는 수비 가담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미헬스의 토탈 풋볼이 축구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탈 풋볼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펠레 시대에도 축구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었으며, 당시 유럽 감독들이 카테나치오, 토탈 풋볼 등 전술을 발전시킨 목적이 펠레와 남미 선수들의 개인기에 대항하기 위해서인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5.2.3. 분석 환경

 

미디어의 발달은 상대 팀, 상대 선수에 대한 분석을 강화시켰다.
해당 클럽에서 뛰는 주요 선수를 직접 상대하거나 경기장에서 직접 플레이를 보지 않아도 상대의 장점과 약점, 파훼법을 연구하기 쉽게 되었다.
그 결과, 그동안 뛰어난 공격수들을 잘 막지 못했던 수비수들에게 큰 득이 되었고, 수비수들의 기량은 전반적으로 크게 상향되었다.
문제는 그 시점이 언제부터인지를 알아봐야 하는데,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요한 크루이프의 영상을 공수하여 분석에 쓴 적이 있고, 옵타는 그 이전인 1966년부터의 월드컵 기록을 수집하여 공개했다.
그리고 현재도 펠레의 영상이 일부 남아있는 것을 볼 때 펠레의 영상이 당시에 보급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과거 카메라의 보급률을 볼 때 그 영상이 귀하긴 했겠지만 말이다.

 

5.2.4. 남미 클럽 수준

 

첫 대회인 1960년부터 펠레가 남미에서 선수 생활을 끝낸 1974년까지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남미 클럽들의 성적은 15전 8승 7패였으며, 우승 횟수도 남미가 8회, 유럽이 7회로 유럽을 상대로 근소 우세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유럽 클럽들은 남미 클럽들을 상대로 원정 경기에서 승리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반면에 남미 클럽들은 유럽 클럽들을 상대로 치른 원정 경기에서 해당 시기에 3번의 승리를 거뒀다.
당시 원정 경기가 현 시대의 원정 경기보다 피로감이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남미 클럽들이 유럽 클럽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봐도 무방한 셈.당시 남미 축구 수준이 마치 펠레의 산투스 이외에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페냐롤과 에스투디안테스 등의 경우도 산투스 못지 않은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유럽 리그 못지 않은 경쟁력을 보여줬었다.
거기다 해외 이적에 보수적이고 보스만 룰이 없던 시기라 남미 최고의 선수들은 대부분 자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브라질 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을 무려 3번이나 우승했으니 남미 리그 수준, 그 중에서도 특히 브라질 리그의 수준이 당시 유럽 리그의 이하라 보긴 어려웠다.
또한 펠레는 산투스와 브라질 국대로 전세계의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실신시킨 경력의 소유자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다수의 마이너 국제대회에서 우승컵을 쓸어담았으니 유럽 커리어가 없는 펠레에 대한 의문은 성립 불가능하다.
유럽 클럽들과 130경기, 그것도 전부 원정경기에서만 144골을 넣은 기록 또한 펠레가 상대를 가리는 선수가 아니었다는 걸 의미한다.
당시 유럽 축구계에 펠레를 능가하는 인물도 없었다.
한편, 최고의 선수들이 모두 유럽으로 쏠리고 있는 현재의 유럽 축구와 비교한다면 밀리는 것이 맞다.
현재의 축구계는 보스만 룰 이후 유럽 빅클럽 위주로 판이 돌아가게 되면서 스타들이 모여 있는 형세이고 현재 UEFA 챔피언스리그의 실질적인 수준은 FIFA 월드컵보다도 위라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수준 뿐만 아니라 모든 요소들을 종합할 때 대회 위상은 월드컵이 압도한다.
) 결국, 펠레를 포함한 20세기의 모든 선수들은 챔피언스리그와 리그에서 현재의 빅리그 선수들보다 느슨한 환경에서 경쟁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럽 리그들이 남미는 물론이고 세계의 우수한 선수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인터컨티넨탈컵 결과를 볼 때 2000년대 중반까지는 남미와 유럽의 수준이 비슷했으나 2010년대부터는 확실히 유럽 클럽들이 압도하는 수준이다.

 

5.2.5. 주립 리그 수준

 

브라질은 영토가 워낙 넓은데다 교통 시설이 열악하다보니 특이하게 각 주마다 주립 리그들이 먼저 창설되었고 그 이후 전국 리그가 늦게 창설되어서 주 단위와 전국 단위의 리그를 서로에 영향이 미치지 않는, 아예 별개의 리그로 운영하고 있다.
축구 선수들이 가장 많이 치르는 경기는 클럽 경기이고, 펠레의 득점 60% 이상이 다른 나라 선수들과는 다르게 주립 리그에서 나온 기록이다보니 이 주립 리그의 수준에 관해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자세히 말하면 펠레가 전성기를 맞이할 당시에는 전국 대회가 창설 초창기였고 각 주립 리그의 챔피언들이 토너먼트 형식으로 붙었던 컵 대회 규모라 현재 같은 정규 리그가 아니었고, 주로 뛰어야 할 리그는 주립 리그였다.
이렇게 되면 지역에 한정된 리그의 수준은 전국 단위 수준과 차이가 크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당시 상파울루 주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펠레 시절 상파울루 주의 클럽들은 18차례의 전국 대회 중 12차레를 우승하며 다른 주립 리그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역사적으로 상파울루 리그와 함께 브라질의 양대 주립 리그로 인정 받는 리우데자네이루 주립 리그가 그 사이 3회 우승에 그쳤다.
또한 브라질 국가대표팀 자리의 절반을 상파울루 주 선수들이 차지한 만큼 선수들 수준도 높았다.
펠레가 참가한 4번의 월드컵에서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보면 1958년 월드컵은 10명, 1962년은 13명, 1966년은 10명, 1970년은 11명이었다.
심지어 펠레가 뛰던 당시에도 이미 상파울루 리그는 주 자체적으로 4부 리그까지 있었으며 강등제도 존재했다.
큰 규모의 하부 리그 시스템을 갖췄다는 것은 그만큼 하위권 팀들과 주의 하부 리그 팀들도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다른 주들은 현재도 2부 리그까지만 보유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전국 대회 성적, 선수 수준, 리그 규모를 볼 때 당시 상파울루 리그가 다른 주립 리그들과 차별화된 평가를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
현재의 리그 형식처럼 전국에서 최고의 팀들을 뽑는 게 더 퀄리티가 있었겠지만, 그와 비견될 수준을 갖췄다.
그러나 브라질 리그의 수준이나 형식은 크게 변화했고 라이트 팬들이 과거 시스템과 환경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는 브라질 전국 리그가 4부 리그까지 운영되고 있는데, 전국 1~4부 리그에 참가하지 못한 팀들 중 주립 리그와 주립 컵 대회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팀들에게 4부 리그 참가 자격을 주고 있다.
상파울루의 일부 팀들도 4부에 소속되거나 아예 전국 리그 참가 자격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과거 펠레 또한 4부 수준의 팀들과 경기해 쌓은 기록이라고 추측하여 주장하는 팬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1차원적인 추측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전체적인 브라질의 수준, 그 브라질 내에서 상파울루 리그의 위상도 다르고, 리그 시스템의 차이점도 알아봐야 하는 등 고려할게 많은데 지나치게 경솔한 생각이며, 그저 펠레를 깎아 내리고 싶은 악의적인 주장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주립 리그 관련 비판은 펠레가 과소평가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선을 지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펠레의 통산 골 기록은 경기 당 1골에 근접하지만, 주립 리그가 아닌 전국 대회에서의 골 기록은 173경기 100골로 경기당 골 수가 통산 기록에 비해 떨어진다.
하지만 이 또한 원인이 따로 있다.
전국 리그는 펠레의 전성기가 끝난 1971년부터 출범했고 펠레의 전국 리그 출전 기록을 살펴보면 1971년부터 브라질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74년까지의 출전 기록이 84경기로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60년대까지의 전국 대회 기록은 76경기 62골, 1966년 월드컵에서의 큰 부상 이전에는 전국 대회에서도 28경기 28골로 경기당 1골의 기록을 세웠다.
반면, 1970년부터 1974년까지 5시즌 동안 전국 대회 기록은 97경기 38골로 펠레의 이름값에 확실히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때는 주립 리그에서의 득점율도 절반 이상이 감소했기 때문에 딱히 리그마다 차별적으로 활약한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상파울루 리그를 대표하는 네 팀은 산투스와 상파울루 FC, 파우메이라스, 코린치안스다.
이들은 전국 리그에서도 우승 횟수 1~4위를 모두 차지하여 브라질을 대표하는 팀들이기도 하다.
이 네 팀은 유럽 6대 리그로 투어를 가기도 했으며 우수한 상대 전적을 거두었다.
상파울루 주 최상위 4팀 vs 유럽 6대 리그 상대 전적 팀별 전적산투스: 111전 74승 16무 21패파우메이라스: 35전 18승 12무 5패상파울루 FC: 34전 21승 8무 5패코린치안스: 32전 24승 3무 5패상대별 전적vs 프리미어 리그: 18전 9승 4무 5패vs 라리가: 50전 27승 12무 11패vs 세리에 A: 66전 46승 8무 12패vs 분데스리가: 28전 20승 6무 2패vs 프랑스 리그1: 22전 16승 3무 3패vs 포르투갈 리가: 28전 19승 6무 3패상파울루 주 최상위 4팀 vs 유럽 6대 리그 경기 목록 산투스 경기 목록 EPL 12전 7승 2무 3패1951년 포츠머스 4-0 승 (홈)1962년 세필드웬즈데이 4-2 승 (원정)1969년 스토크시티 3-2 승 (원정)1970년 첼시 4-1 승 (베네수엘라)1970년 웨스트햄 2-2 무 (미국)1971년 첼시 1-0 승 (자메이카)1972년 아스톤빌라 1-2 패 (원정)1972년 세필드웬즈데이 2-0 승 (원정)1972년 뉴캐슬 4-2 승 (홍콩)1972년 코벤트리 시티 2-2 무 (태국)1973년 풀햄 1-2 패 (원정)1973년 폴리머스 2-3 패 (원정)세리에 44전 31승 4무 9패1959년 인테르 2-3 패 (원정)1959년 인테르 7-1 승 (스페인)1959년 제노아 4-2 승 (원정)1960년 로마 3-2 승 (원정)1960년 피오렌티나 0-3 패 (원정)1961년 유벤투스 2-0 승 (원정)1961년 로마 5-0 승 (원정)1961년 인테르 4-1 승 (원정)1963년 로마 4-3 승 (원정)1963년 인테르 0-2 패 (원정)1963년 밀란 0-4 패 (원정)1963년 유벤투스 3-5 패 (원정)1963년 밀란 2-4 패 (원정)1963년 밀란 4-2 승 (홈)1963년 밀란 1-0 승 (홈)1965년 밀란 1-1 무 (미국)1965년 밀란 0-1 패 (베네수엘라)1966년 인테르 4-1 승 (미국)1967년 만토바 2-1 승 (원정)1967년 베네치아 1-0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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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 당대 라이벌

 

역대 최고로 거론되는 축구 선수들은 대부분 시대의 정점 자리를 두고 엎치락 뒤치락하던 라이벌이 있었다.
1950년대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 1970년대는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가 시대를 양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80년대는 디에고 마라도나를 정점으로 두는 평이 현재는 많으나, 1986년 월드컵 이전에는 미셸 플라티니와 지쿠, 그 이후에는 마르코 판바스턴과 뤼트 굴리트, 로타어 마테우스가 그와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으며, 현재 위상에 비해서 당시 정점에 오른 기간이 짧은 편이다.
1990년대 초반은 지배자를 손꼽는 것 자체가 어려우며,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도 호나우두와 지네딘 지단이 선두에 있는 와중에 수많은 선수들이 두 선수를 위협하는 군웅할거 시대였다.
마지막으로 가까운 현대인 2010년대는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가장 치열한 라이벌리를 보여줬다.
그러나 1960년대의 펠레는 유일하게 독보적인 위상을 가졌다.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전설들 중 에우제비우, 지아니 리베라, 산드로 마촐라, 바비 찰튼은 실제로 펠레와 맞대결을 가졌음에도 패배하면서 레벨 차이를 느껴야 했고, 산투스와 남미의 패권을 다툰 페냐롤의 에이스들인 알베르토 스펜서와 페드로 로차 역시 펠레와 비교하면 한 수 접어야했다.
그나마 펠레에 가깝게 근접했던 2인자로 볼 수 있는 가린샤도 클럽 소속 활약상은 펠레에게 역부족이었고, 국가대표로서는 유일하게 펠레와 비교될만 했으나, 펠레가 1970년에 3번째 월드컵을 차지하면서 그마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게 되었다.
60년대 선수들이 기록적인 면에서 이득을 봤다고는 하지만 당시 브라질에서 펠레의 득점 페이스는 독보적이었다.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득점 기록에서 최정상을 다투는 수준이었다.
1964년의 데니스 로처럼 일시적으로 펠레보다 많은 골을 넣은 선수는 있었지만 펠레만큼 꾸준히 득점 페이스를 유지했던 선수는 없다.
그나마 득점이라는 기록 측면에서 근접했던 선수는 지미 그리브스, 에우제비우 정도. 그마저도 펠레나 에우제비우와 다르게 데니스 로나 지미 그리브스는 최전방 공격수였다.
그런데 현재 21세기의 선수들은 철저한 자기 관리로 기량을 상승시키고 있는 반면, 과거의 선수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위 선수들 중에서도 가린샤는 알코올 중독, 크루이프는 골초, 마라도나는 마약 중독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훈련까지 안하고 평범한 신체 능력으로 경기에 임한 것은 아니겠지만, 시대가 지날 수록 전체적인 인류의 신체도 진화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기 관리도 부실했던 과거 선수들과 경쟁했다는 것은 펠레의 평가에 좋게 작용되지 않는다.
물론 과거에는 훈련이나 식단 조절, 의료 등이 열약했기 때문에 현대처럼 체계적인 관리를 받긴 힘들었고, 당연히 펠레 본인도 기술적인 관리를 통한 기량 상승을 바랄 수 없이 본연의 재능을 통해 업적을 이뤄야했다.
펠레의 파트너였던 가린샤는 알코올 중독 뿐만 아니라 지적 장애와 하체에 장애까지 있었다.
슬럼가에서 태어나 어릴적 소아마비를 겪는 등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으며, 오죽 장애가 심했으면 의사가 보조장치를 달지 않으면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질 수도 있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이마저도 당시 외과의사가 수술을 단행해서 나아진 것이었다.
이에 대해 가린샤를 장애를 극복한 선수라고 칭송하는 반응들이 있는 반면, 당대 축구 수준에 의문을 가지는 반응들도 있다.
물론 시대적으로 스포츠과학이나 인프라 환경이 현대만큼 발달하지 못한만큼 펠레 역시 남들과 같은 환경에서 경쟁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펠레가 당시 시대에서 가장 압도적인 기량을 보였다는 점이다.

 

5.2.7. 장비

 

펠레 시대에는 장비들도 오늘날 장비들에 비해서 낙후된 것들이었다.
지금보면 축구의 기초적인 개인기인 드래그 백 조차도 페렌츠 푸스카스가 실제로 웸블리에서 보여주기 전에는 거의 뜬구름 잡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푸스카스조차 그 드래그 백을 실전에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연습했는데 동료들이 비웃을 정도였다.
이 원인이 바로 낙후된 장비였다.
푸스카스가 옛날 선수라해서 기술이 별로 뛰어나지 못한 선수라 생각할 수 있는데 호주에서의 크로스바 챌린지 일화, 샤워장에서 동료 프란시스코 헨토가 던져주는 물 묻은 비누를 장난치듯 가지고 놀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컨트롤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던 선수다.
그리고 당연히 필드라 할 수 있는 축구장도 오늘날에 비교하면 질이 매우 떨어지는데, 잔디부터가 좋지 않다.
유럽은 그나마 덜했지만 남미 축구 경기에서는 흙먼지가 풀풀 일어나기까지 했다.
축구공의 경우도 현재와 많이 달랐는데, 당시 축구공은 잘못하면 선수 생명에 지장이 갈만큼 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토스탕의 경우. 당시 축구공에 눈을 잘못 맞은 뒤, 망막 박리라는 병이 생겨 선수 생활에서 은퇴해야했을 정도다.
따라서, 과거의 선수들은 현재 선수들보다 정교한 기술을 구사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5.2.8. 축구 규정

 

펠레 시대에는 체계적인 퇴장 제도와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고, 오프사이드의 동일선상이 인정되지 않는 등 규칙 면에서 공격수에게 불리한 점들이 많았다.
특히 퇴장 제도가 없었던 당시에는 지금 기준으로 퇴장감인 태클들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과거에도 퇴장 제도가 존재하기는 했는데, 상대 선수에게 직접 폭력을 가하는 등 규칙을 심각하게 위반할 경우 심판이 구두로 선수를 내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 중에 주로 일어나는 비매너 플레이들은 여기에 해당이 안 됐다.
펠레는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심각한 더블 백태클을 받았지만 상대 선수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다.
레드/옐로카드 제도는 1966년 월드컵 8강에서 처음 등장했고 1970년 월드컵부터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펠레의 부상이 옐로/레드카드를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
종목 자체가 선수 생명을 고려하지 않고 운영되었으며, 이런 열악한 운영은 선수가 개인기나 전술을 구현할 때 제약이 따를 수 있다.
다.

 

5.2.9. 팀 내 비중

 

당시 브라질은 세계 최강의 팀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펠레가 동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수혜자가 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펠레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확인해보면 된다.
브라질에 훌륭한 선수가 많았다고는 하나 1958년부터 1970년까지 계속 주전으로 활약하며 월드컵 3회 우승을 모두 경험한 선수는 펠레가 유일했다.
펠레가 월드컵에 14경기 출전해서 총 12골 10도움을 기록했는데,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한 두 경기인 1962년 FIFA 월드컵 체코슬로바키아전과 1966년 FIFA 월드컵 포르투갈전만 제외하면 모든 경기에서 스탯을 찍었고, 경기에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득점에 기여해줬다.
또한 1958년부터 1970년까지 월드컵에서 브라질 선수들의 스탯을 보면 2위인 가린샤가 5골 5도움, 총 10개로 뒤를 잇는다.
가린샤마저 공격 기여도는 펠레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팀 내에서도 펠레의 기록은 압도적이었다.
펠레가 3번의 월드컵 우승 중 1958년, 1970년의 우승은 펠레 본인이 에이스 역할을 하며 활약했으나, 1962년 월드컵에서 펠레는 16강 조별리그 2경기만에 부상으로 낙마하였는데, 이후 경기들에서 가린샤가 엄청난 기량을 선보이며 1958년 당시보다 4년 더 늙어버린 멤버들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펠레도 "사람들은 1958, 1962, 1970년의 월드컵을 나의 월드컵이라고 하지만 1962년 월드컵은 가린샤의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것이 맞는다.
"라고 밝힌 바 있다.
위의 논란을 꺼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사례를 근거로 든다.
그러나 195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펠레를 제외한 1958년 월드컵 멤버들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에게 연달아 패배했다.
이 팀에 펠레가 합세하고 월드컵을 우승했다 1966년 월드컵에서 똑같이 펠레가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브라질은 16강 조별리그에서 충격적인 탈락을 맞이했다.
펠레가 은퇴하고 나서는 호베르투 히벨리누, 자이르지뉴가 건재함에도 1974년 FIFA 월드컵 우승에 실패했고 브라질이 다시 월드컵을 우승하기까지 24년이 걸렸다.
전체적으로 펠레의 공백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1962년 월드컵 하나의 사례만으로 이를 주장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1970년 멤버들은 현재 역대 최강이라 평가 받지만 이는 결과가 따라준 뒤의 평가이고, 대회 직전까지는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주앙 살디나 감독이 도중에 마리우 자갈루 감독으로 교체된 점에, 아르헨티나와의 평가전에서 로베르토 페르푸모가 "이 브라질은 내가 본 브라질 중 가장 최약체 팀"이라 발언할 정도로 전망이 썩 좋은 팀은 아니었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브라질에게 줄리메컵 영구 소유권을 가져다 준 선수가 펠레다.
펠레의 우승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속했던 클럽인 산투스도 당대 최고의 팀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펠레의 합류 이전의 산투스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것과는 다르게 리그를 압도하던 팀이 아니었다.
1956년 펠레의 입단시점엔 이미 주립리그 10회이상씩을 우승한 코린치안스와 SE 파우메이라스가 리그를 양분하는 형세였고 이를 상파울루 FC가 쫓아가는 양상이었다.
이 시점에서 산토스의 주립리그 우승은 고작 2회에 불과했다.
그러나 산토스는 펠레가 합류한지 4시즌이 되던 해부터 세계구급 강팀으로 변모하게 된다.
펠레가 이끄는 산투스는 1962년 월드컵 대표팀에 7명, 1970년 팀에는 5명을 차출시키기도 했고 73경기 연속 득점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2017년 레알 마드리드가 유일하게 동률을 이뤘는데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그러나 경쟁팀에 해당하는 파우메이라스에게 7:1과 5:0으로 대파당한 일이 있었으며 전자의 스코어는 펠레가 결장했을 때의 결과다.
브라질 내 절대적 강자까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팀 수준만을 놓고 비판을 한다면 여기서 자유로운 선수는 몇이나 될지 볼 필요가 있다.
최근의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포함한 역대 상위권 선수들은 대부분 최고 수준의 클럽이나 국가에서 뛰었으며 소위 얘기하는 '팀빨'을 안 받은 선수가 오히려 찾기 더 힘들다.
특히 현재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빅클럽으로 쏠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과거의 클럽들은 물론이고 국가대표팀의 전력도 능가한다.
애초에 당대 최고의 선수를 최고의 팀이 영입하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선수는 나폴리 소속이었던 디에고 마라도나 한 명 밖에 없으며 마라도나도 세부사항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나폴리가 약체로 불리울만한 전력은 아녔다는 관점 역시 상당수 존재한다.
그 이후에도 지쿠, 소크라치스, 베베투, 호마리우, 히바우두, 호나우두, 카푸, 호나우지뉴, 카카 등 세계 축구계를 호령하던 전설들이 끊임없이 나왔고, 그들이 브라질 축구의 명성을 이어왔지만 누구도 펠레와 비교될 만한 업적을 세우지 못했다.

 

5.2.10. 득점 기록

 

펠레는 자신의 기록으로 1283골을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매체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펠레의 골 기록은 매체 별로 차이가 나는데, 흔한 매체들은 812경기 757골로 보고 있고,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는 821경기 761골, RSSSF는 841경기 775골로 기재하고 있다.
이렇게 골 수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특정 대회를 공식 대회로 보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선 1968년과 1969년에 인터컨티넨탈 슈퍼컵이 열렸는데, 이 대회는 1960년대 인터컨티넨탈컵 챔피언들이 모여 왕중왕을 가리기 위해 개최되었다.
여기서 펠레는 1968년 대회를 우승하고 두 번의 대회 통산 8경기 3골을 넣었다.
이 대회는 2005년 남미축구연맹에서 공식 대회로 인정한 바 있다.
실제로 두 대륙의 연맹이 주최했으니 공식으로 인정하는게 맞긴 하다.
또한 1968년 브라질 전국 리그에서 펠레의 18경기 12골 기록은 영문 위키피디아를 포함한 대다수 매체에 17경기 11골로 잘못 기록이 되었다.
이렇게 기존의 812경기 757골에서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8경기 3골과 1968년 리그 1경기 1골을 추가하면 821경기 761골로 위에 언급한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와 동일한 기록이 되며, 현재를 기준으로 산정하면 이게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RSSSF의 경우에는 상대 팀도 동일한 성격일 때, 리저브 리그, 국가대표 B팀, 국가대표 군인팀, 리그 올스타, 지역대표팀, 도시대표팀 등 과거의 특수한 기록들의 일부를 공식 기록으로 수용하여 펠레의 기록이 더 높게 기재되었다.
펠레가 주장하는 1283골은 현재 기준 비공식 경기나 클럽 친선 경기들을 포함해 모든 경기를 산정했을 때 나오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것도 기관마다 통계가 다르다.
펠레는 역대 최다 골을 기록한 선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는데, 기네스북은 펠레의 득점 수를 1279골로 인정했다.
FIFA는 펠레의 통산 득점을 1281골로, RSSSF는 비공식 기준 1301골로 인정했다.
또, 일부 언론들은 펠레의 기록을 1289골로 보도하는 등 숫자가 참 다양하다.
그리고 본론에 들어가자면, 이 문서에서 나열한 사항들만 봐도 과거와 현재 선수들의 시대적 환경에 매우 많은 차이가 있는데다 공식 경기의 기준도 다르니 시대가 다른 선수들의 득점 기록을 나열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이긴 하다.
거기다 펠레가 주장하는 기준처럼 선수 커리어의 모든 경기를 인정할 때 정작 펠레가 역대 최다 득점을 기록한 선수가 아니다.
자신이 넣은 득점 중 500골 가량이 말소되는 것이 아깝기야 하겠지만 기록은 둘째치고 자신이 가장 많은 골을 넣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RSSSF가 커리어 통산 득점을 기준으로 기재한 비공식 순위에서 펠레는 8위에 그쳤다.
비공식 1위 선수는 헝가리의 러요시 티치인데, 펠레보다 600골 이상을 더 득점했다.
FIFA 또한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가 1329골을 넣었다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는 펠레보다 많은 득점 수다.
다만, 이러한 선수들은 등재 시도가 안된 것인지 기네스북의 최다 골 축구 선수로는 펠레가 등재되어있다.
1969년 펠레가 1000번째 골을 넣는 순간 기자들이 에워싸 경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한국에서도 펠레의 1000번째 골에 대한 기사가 실리는 등 펠레의 현역시절엔 이 득점기록이 제대로 된 기록으로 인정받았다.
나중에 득점기록에 대한 변화는 이후 축구 환경이 바뀌면서 생긴 시대적인 차이로 볼 수 있다.

 

5.2.11. 혹사

 

과거의 축구가 활동량이 적다고는 하는 반면, 커리어 전체 경기 수를 볼 때는 과거 선수들이 현재 선수들보다 많은 출전 수를 가지고 있다.
펠레는 1390경기, 페렌츠 푸스카스는 1270경기, 게르트 뮐러는 1228경기, 호마리우는 1209경기를 치렀다.
현재 선수들은 나이 40이 될 때까지 철강왕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1000경기 이상을 찍기 어렵다.
그만큼 과거의 선수들은 혹사를 당했는데 그 중에서도 펠레는 돈을 벌기 위해 장시간 비행기를 타며 세계를 쏘아다녔다.
월드 스타였던 펠레를 산투스가 가만히 둘 리는 없었고, 그는 산투스의 마케팅에 적극 활용되었다.
22일 동안 9개의 국가로 가서 15경기를 치르기도 했으며 한 해동안 무려 109경기를 소화하는 기록도 세웠다.
1965년 이후부터는 브라질 축구 협회의 불참 지시와 더불어 해외 친선경기가 더욱 돈벌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산투스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도 불참하고 본격적으로 세계 투어를 잡기 시작했다.
1년 간 10개국 이상은 기본에, 내전 중인 국가에도 들어가서 경기를 뛰었고, 시즌 중에 리그 일정을 무시하고 해외 친선경기를 잡기도 했다.
그렇게 리그 도중에 가서 뛴 곳은 악명 높은 해발고도 약 4,000m의 볼리비아 라파스였다.
결국 1972년에는 우리나라까지 찾아와서 전반전을 소화하며 골을 넣었다.
이러한 경기들의 목적은 펠레를 통한 마케팅이기 때문에 펠레는 선발, 풀타임으로 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경기 수가 많기도 했지만 그보다 문제인 건 장시간의 비행과 반복되는 시차의 변화는 선수 생명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규정에서 이야기했듯 선수 교체 룰이 없어서 체력 안배가 힘들고 선수 부상시 대체자를 투입하지도 못했다.
여기에 파울에 대한 제재도 부족했다.
과거에도 체력적으로 힘든 점들이 여러모로 있었단 걸 알 수 있다.

 

5.3. 비판

 

펠레에 대한 평가절하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당시 축구의 수준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서도 위의 문단들이 반론을 제기하지만, 결국 눈에 보이는 수준 차이는 의견을 엇갈리게 하고 있다.
물론 펠레가 미래에서 온 것도 아닌만큼, 당시 시대에서 이견의 여지없는 최고의 모습을 보인 것으로 충분하다는 반론도 있다.
수준으로 퉁쳐서 말하지만 의료, 인프라, 시설 등도 현대에 비해 떨어졌던만큼 현대의 선수들이 과거에서 활약했으면 펠레만큼 활약할거라 보장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펠레가 자신의 기록에 지나치게 자부심을 가지고 현대 선수들을 저평가하는 경향을 보인 적이 있어서, 유독 당시 시대에 대한 논쟁이 뒤따르는 편이다.
또한 월드컵 3회 우승이란 업적에 관해서도 기록과 실제 활약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논쟁이 있다.
1962 FIFA 월드컵 칠레 당시에 펠레가 출전한 경기는 조별리그 2경기 뿐이었다.
첫번째 경기에는 확실히 1골 1도움으로 활약했지만, 두 번째 경기는 부상으로 전반전에 아웃되었다는 점이 지적을 받는다.
다만 월드컵 1회 우승을 제외하더라도, 2번의 월드컵에서 MVP급 활약으로 팀을 우승시킨 선수가 펠레 외에는 없기에 월드컵 활약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5.4. 펠레에 대한 언사

 

How Do You Spell Pele? G - O - DThe Sunday Times(1970년 브라질의 세번째 월드컵 우승 소식을 전하면서)그러나 최고의 스포츠 선수는 펠레타임즈(마이클 조던의 은퇴기사 중)내가 넣은 가장 위대한 골은 셀레스트와의 원-투야. 그리고 우리는 그 골을 에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라고 이름 지었지.돈지뉴(펠레의 아버지)리어왕인지, 황제 존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황제처럼 보였다.
타당하게도 완벽한, 그의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망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어떤 농촌에다가 데려다 놓더라도 그의 왕조의 위엄은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넬슨 로드리게스(스포츠 평론가. 1958년 2월 26일에 나온 칼럼으로, 펠레를 최초로 '황제'라고 불렀다.
)이제 우리는 안다.
왜 사람들이 이 사람을 왕이라고 불러 왔는지, 그가 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로 알려져 있는지...제럴드 신스타트, ITV에서 1970년 월드컵 준결승전을 해설한 해설자, 펠레의 노 터치 트릭 직후에 한 발언What a beautiful goal from Pelé! El Rey Pelé!휴 존스, ITV에서 1970년 월드컵 결승전을 해설한 해설자현재, 지금껏 우리가 본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가 펠레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는가?휴 맥킬바니, 잉글랜드의 축구 기자, 펠레의 1970년 월드컵 우승 직후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이 땅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펠레는 하늘에서 만들어졌지.제프리 그린 (영국의 저명한 축구 기고가)펠레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입니다.
나는 오늘밤 넷플릭스에서 만든 새 펠레 다큐멘터리가 너무나 기대됩니다.
전세계적으로 넷플릭스를 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케니 달글리시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인은 1위 펠레, 2위 무하마드 알리, 3위 마이클 조던, 4위 마라도나, 5위 우사인 볼트.데이비드 파이텔슨 (멕시코의 스포츠 평론가, 톰브래디의 은퇴날 트위터)스포츠 종목별 GOAT는 축구 펠레, 농구 조던, 복싱 무하마드 알리, 미식축구 브래디.루이스 로베르토 알베스 (브래디가 은퇴하던 날.)펠레, 마라도나, 메시 중에서 최고는 펠레입니다.
오스발도 보스카치 (아르헨티나의 스포츠 평론가)펠레는 축구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그는 축구를 아름다운 게임의 완벽한 본보기를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본적 없는 여유로운 플레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인판티노 (현재 FIFA 회장)내가 여태 본 선수 중 최고 5명은 1위 펠레, 2위 메시, 3위 마라도나, 4위 호날두, 5위 디스테파노.호세 라몬 페르난데스 (1978월드컵부터 10번 이상 월드컵을 중계해온 멕시코 스포츠 기자)펠레가 있던 시절의 브라질은 007영화에서 나오는 온갖 신기한 장치가 달린 자동차와 같았다.
(중략) 하지만 펠레가 은퇴하고 난 후의 브라질은 모든 장치를 다 떼고 의자가 튀어나가는 장치만 남은 자동차가 되었다.
닉 혼비(영국의 소설가. 자신의 저서 '피버피치' 중에서)제 이름은 로널드 레이건입니다.
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본인이 누구인지 밝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펠레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로널드 레이건그의 플레이를 보는 것은 아이의 기쁨을 보는 것이었다.
인간의 비상한 은총과 결합된 아이의 기쁨.넬슨 만델라펠레는 미국 축구를 전례 없는 수준으로 높여주었습니다.
이것은 펠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지미 카터펠레는 22년간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전세계의 어떤 외교관보다 더 세계 평화에 공헌했다.
J.B. 피녜이루 (주미 브라질 대사)펠레는 내 이론(미래에는 누구나 15분간 유명해질 수 있다)을 반증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15분간의 명성 대신 1500년의 명성을 누릴 것이다.
앤디 워홀오늘에서야 펠레가 나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알았다.
무하마드 알리(펠레의 은퇴 경기에서 펠레를 향해 관중들이 손수건을 흔드는 것을 보며. 알리는 바비 무어와 함께 펠레의 은퇴 경기에 초청받았다.
)축구는 잘 모른다.
음... 하지만 펠레는 안다.
마이클 조던(1994년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릴 당시 축구에 대해 관심이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나는 무하마드 알리와 펠레를 넘어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 선수가 되려고 노력한다.
우사인 볼트 (팀닥터가 펠레의 정신연령이 12살밖에 되지 않는다며 출전을 금지시키는 것을 권유했을때) 당신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축구를 알지 못하며,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봤다.
비센치 페올라눈을 깜빡일 때도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면서 깜빡여야만 했다.
두 눈을 동시에 깜빡이면 펠레는 어느새 골을 넣고 있었다.
브리투메시와 호날두 중 누가 최고냐고요? 제 생각에 펠레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입니다.
메시와 호날두도 뛰어난 선수들이지만, 펠레가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입니다.
디노 조프 (1982 월드컵 우승 당시 이탈리아의 주장이자 이탈리아 선수로 유일하게 유로와 월드컵 모두 우승한 선수)마라도나는 현재의 메시와 호날두를 합친 선수였고, 의심할 여지 하나도 없이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는 펠레다.
안드레아스 브레메 (1990 월드컵 결승전에서 결승골 넣은 독일선수)마라도나, 메시, 호날두도 좋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는 펠레입니다.
조반니 트라파토니 (2002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감독)펠레는 마라도나와 메시보다 뛰어난 선수입니다.
저는 펠레와 라이브로 경기해서 운이 좋았습니다.
그는 막강한 피지컬을 자랑하는 선수였고 저는 그를 상대할 때마다 힘들었습니다.
다니엘 오네가 (196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이자 대회 통산 단일대회 최다득점 기록을 보유한 아르헨티나 레전드)예전에는 펠레, 마라도나 등과 직접 경기장에서 붙어봤고, 지금은 메시를 봤습니다만, 그들 중 가장 완벽한 선수는 펠레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다른 시대의 선수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펠레는 선수로서 구성요소부터가 최고였습니다.
그는 환상적인 기술, 드리블을 갖춘 선수였습니다.
스피드도 매우 빠르고 어시스트도 매우 많이 했죠.다니엘 솔소나펠레, 마라도나, 메시, 3명 중에 한 명을 골라야 한다면 나의 선택은 펠레다.
호세 바라카 (1959년 코파아메리카 우승한 아르헨티나 주전 선수)펠레는 완벽하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는 게다가 3번의 월드컵 우승과 1,283골을 넣었다.
펠레 다음으로는 마라도나,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크루이프와 메시이다.
노르베르토 알론소 (1978년 월드컵 우승한 아르헨티나 선수)경기에 임하면서 그도 마찬가지로 피부와 뼈로 된 사람이라고 몇 번이고 내 자신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타르치시오 부르니치(1970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 당시 펠레를 막는 임무를 맡았던 이탈리아 수비수)펠레를 막으려는 임무를 수행하려 했을 때 몸이 공처럼 튀었다.
지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난다.
야마구치 요시타다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동메달 주역 일본 국대 주전)그는 위대한 컨트롤과 시야를 갖춘 엄청난 재능을 지닌 선수였다.
그는 경기를 읽고 포지션을 읽었다.
그는 거만했지만 그걸 나쁜 방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는 위대한 선수였으니 뽐 좀 내면 또 뭐 어떤가?난 가끔 이 축구란 스포츠가 이 마법같은 선수를 위해 발명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바비 찰튼루이스 피구, 히바우두, 지네딘 지단 같은 선수들 모두 훌륭하지만 그들에게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
그건 바로 펠레다.
펠레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수다.
그는 20년간 최고로서 군림했다.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는 그의 밑이다.
펠레와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내게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는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때가 아니라 펠레와 함께 뛰었던 때였다.
지금 리오넬 메시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며, 그의 선수생활 내내 그랬다.
그러나 역대 최고는 펠레다.
나는 펠레와 같은 선수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뉴욕 코스모스에 있을때 같이 뛰었는데, 그에게 공을 주면 그가 너무 빨라서 다신 볼 수 없었다.
펠레는 모든 것이 본능이었다.
그는 내가 본 가장 완벽한 플레이어였다.
(펠레 에테르노 중에서)프란츠 베켄바워나는 제2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될 수 있어도 제2의 펠레는 될 수 없다.
그의 축구는 우리 모두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크루이프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이다.
하지만 나는 펠레는 선수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축구에 관한 한 그는 단순히 최고의 선수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페렌츠 푸스카스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펠레.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모두 특별한 자질들을 지닌 위대한 선수들이다.
하지만 펠레가 더 뛰어났다.
펠레는 호날두와 메시를 합친 것보다 뛰어났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펠레는 펠레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세자르 삼파이우펠레를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펠레는 펠레이다.
그는 완전히 다른 레벨에 있는 선수이다.
신은 펠레에게 모든 걸 주셨고, 나머지 찌꺼기를 우리에게 주셨다.
호베르투 히벨리누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펠레를 상대했던 순간이 내 커리어 최고의 순간이었다.
Q: 펠레가 현시대에서 뛰었어도 과거만큼이나 많은 골을 기록했을거라 자신합니까?A: 물론입니다.
그것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경이로운 운동 선수(펠레 에테르노 중에서)펠레는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그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고든 뱅크스나는 이제 자식들, 가족들, 친구들에게 말해 줄 수 있다.
내가 역사상 최고의 선수와 플레이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말이다.
대회 전부터 우리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펠레가 우리가 우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펠레가 그렇게 말했다면 우리는 결국 월드컵을 우승할 터였다.
그의 가장 거대한 비밀은 바로 그의 즉흥성에 있다.
그가 해낸 그 모든 일들은 한 순간에 일어난다.
그는 축구에 관한 한 비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이라 꼽히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브라질 대표팀의 주장이자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먼저 펠레라는 인간이 있다.
그리고 나서 펠레라는 선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펠레처럼 플레이한다는 것은 신처럼 플레이하는 것을 뜻한다.
미셸 플라티니어두운 방을 밝게 밝힐 수 있는 예술가. 1970 월드컵 결승전에서 펠레로부터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에게로 이어진 패스는 랭보의 시와 같았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보는 이들에게 영원함을 느끼게 한다.
에릭 칸토나펠레가 날 보고 세계 최고의 선수라고 말해줬다.
이는 내 인생 최고의 영예이다.
조지 베스트난 우상이랄게 딱히 없는 사람이지만 난 선량한 브라질 사람이고 또 그러므로 펠레를 우러러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우리에게 있어 신과 같다.
뭐,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내 생각에 이 게임은 축구가 아니라 펠레라 불려야한다.
리오넬 메시는 최고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타고났다.
하지만 그는 먼저 디에고 마라도나와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펠레를 뛰어넘어야겠지.호마리우펠레는 위대한 선수가 가득했던 시기에 가장 빛났던 최고의 선수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수였을뿐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젊고 훌륭하며 아직 많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는 선수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내가 본 선수 중 펠레에 견줄 수 있는 선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에우제비우세기의 선수에 대한 논쟁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가능한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펠레. 그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추가될 수 있겠지.신이 펠레를 만들 때, 축구선수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집어넣었다.
슈팅하는 법, 드리블하는 법, 헤더 슈팅을 하는 법, 몸을 쓰는 법 등. 축구계에서 그가 성취한 것을 다른 사람이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술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마음가짐으로든 어떤 관점에서 보든 펠레는 최고이다.
마라도나와 비교해서도 펠레가 더 뛰어났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말하자면 공중제비를 넘는 광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펠레는 무엇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으며, 팀이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공중제비를 넘을 수 있는 선수였다.
지쿠펠레가 결승전에서 5번째 골을 넣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나조차도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어.지게 팔링 (1958 스웨덴 월드컵 당시 결승전에서 펠레를 상대했던 스웨덴의 미드필더)난 위대한 선수를 막는다는 희망을 갖고 도착했으나 우리와 같은 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선수로 인한 완전한 실패에 설득되어 돌아갈수 밖에 없었다.
코스타 페레이라 (1962년 인터컨티넨탈 컵 당시 SL 벤피카의 골키퍼)Q: 직접 본 선수 중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 A: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Q: 그 순서대로인가?A: 그렇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펠레는 내가 지금까지 본 선수 중 최고였다.
펠레는 마라도나,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도 뛰어난 선수였다.
알렉스 퍼거슨브라질에서는 펠레가 누군지, 네이마르가 누군지 모두 안다.
우리는 오직 한 명의 펠레만 알고 있다.
어떤 누구도 펠레가 될 수 없다.
(네이마르는) 아주 좋은 선수다.
때로 스펙타클한 경기력을 보인다.
바르셀로나 시절에 많이 발전했다.
그러나 절대 펠레와 같을 수 없다.
누구도 그와 동등할 수 없다.
펠레는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 그의 움직임은 컴퓨터 게임으로도 재현해 낼 수 없다.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저는 펠레 = 축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진정한 스페셜 원, 펠레를 가지고 있죠.주제 무리뉴나에게 두 명의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와 펠레다.
알프레도는 펠레보다는 한 걸음 정도 아래다.
월드컵에서 플레이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펠레가 플레이하는 것을 보고 축구화를 벗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
쥐스트 퐁텐펠레는 모든 부문에서 매우 뛰어났고, 빠르고, 강했고, 두 발을 가지고 있었고, 정말 특별한 존재였다.
축구계에서 그를 영입하기에는 충분한 돈이 없을 것이다.
앨런 멀러리 펠레는 내가 본 선수 중에서 가장 완벽했다.
그는 모든 것을 지녔었다.
뛰어난 양발과 마술같은 공중에서의 능력, 민첩함, 강력함까지. 그는 기술로도 스피드로도 선수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173cm밖에 되지 않았지만 피치 위에서 그는 마치 거인처럼 보였다.
완벽한 균형과 비현실적인 시야도 지녔었다.
그는 피치 위에서 모든 것을 무엇이든지 보여줄 수 있었기에 가장 위대했다.
브라질 기자가 사우다냐에게 스쿼드 내 최고의 골키퍼가 누구냐고 묻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펠레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느 포지션에서건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바비 무어10번이 지구상 최고의 선수인 펠레의 것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난 펠레가 아니었기에 왼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정말 완전한 선수였다.
그는 위대한 양발과 당해낼 재간이 없는 볼 컨트롤을 소유했고 골문 앞에서는 무자비한 선수였다.
펠레는 축구에 있어 모든 것을 대변했다.
그가 피치 위에서 보여준 모든 것들 때문에.마리우 자갈루비교하는 것은 추잡하지만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였다.
그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그리고 리오넬 메시의 혼합체였다.
만약 우리가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면 신께선 흑인 펠레를 완벽하게 만드셨다.
신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는 전혀 모자란 것이 없었다.
헤딩, 체력, 드리블, 피니시, 영감, 천재성, 성질, 시야, 골. 모든 것을 지녔다.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디에고 마라도나는 위대한 공격수이자 플레이어였지. 하지만 그는 펠레가 아냐. 나는 디에고를 펠레와 비교할 수 없어.지투(1958 스웨덴 월드컵, 1962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월드컵 2연패 당시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펠레의 산투스 시절 동료이자 펠레가 초기 선수 시절 존경했던 선수)메시가 마라도나처럼 되려면 월드컵 우승은 필수다.
그런 마라도나보다 펠레는 더 영특한 선수였다.
그는 축구를 더 잘 이해했다.
다니엘 파사레야펠레가 최고였습니다.
마라도나도 잘했지만 왼발 밖에 잘 쓰지 못했죠. 지금의 메시도 뛰어나지만 메시는 바르셀로나에 있기 때문에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가와 히로시 (1924년생으로 1952년부터 60년 넘게 축구기자로 활동했고 피파 회장상을 받은 일본축구 기자)축구 역사에서 펠레가 마라도나보다 훨씬 더 나은 선수이다.
펠레와 다른 나머지 선수들 사이에는 천 마일의 간극이 있다.
아마데오 카리소(1950~1960년대 활동한 아르헨티나의 레전드 골키퍼)몇몇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펠레를 만져보고 싶어하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키스를 하고싶어 했다.
심지어는 펠레가 걸었던 땅에 입을 맞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클로도아우두(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의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펠레는 선수의 피부, 헤딩, 스피드, 모든 것을 지녔다.
내가 그와 경기를 했을 때 그는 마치 하얀 옷을 입은 흑표범과 같았다.
그는 마지막 몇 분을 남기고 플레이하러 입장했는데 그러고도 그는 경기를 뒤집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큰 차이는 펠레는 필드 위에 공포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마라도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게 있어 최고의 선수는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그리고 디에고 마라도나, 이 순서이다.
난 디에고를 인정하며 그는 위대한 선수이다.
그러나 다른 별에서 온 선수는 바로 펠레였지 그가 아니었다.
메시? 그보다는 펠레, 마라도나,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와 지단이 더 뛰어나다.
만약 펠레와 마라도나, 크루이프의 시대였다면 메시는 뛰지 못했을 것이다.
메시는 벤치에 있었어야 할 것이다.
펠레가 역사상 최고다.
당신이 축구에 대해서 논할 때, 당신은 펠레를 논외로 두고 나머지에 대해 말해야한다.
그리고 또 알프레도, 크루이프, 디에고가 있다.
펠레, 그 흑인은 퓨마였고, 무서운 존재였다.
펠레는 2단 점프를 한다.
일단 잔디에서 점프를 한 뒤엔, 공중에서 한 번 더 뛴다.
그는 마치 농구 선수 같았다.
그는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를 상대로 헤더 골을 넣기 위해 내가 일생에서 본 것 중 가장 높은 점프를 보여줬다.
우고 가티(보카 주니어스 시절 디에고 마라도나의 동료이자 보카 주니어스 역사상 최다 출전 골키퍼 기록 보유자)메시는 엄청난 선수이다.
나는 메시를 보려고 TV를 켤 때마다 그의 플레이에 놀란다.
그러나 최고는 펠레이다.
펠레는 메시보다 더 크고, 강했으며, 헤딩에도 능했다.
펠레가 메시보다 더 뛰어난 선수다.
펠레는 마치 ‘외계인’ 같은 선수였다.
지금까지 나는 펠레보다 더 뛰어난 선수를 보지 못했다.
펠레는 메시의 능력과 호날두의 장점을 모두 가진 선수다.
메시는 디스테파노와 같은 위대한 선수들을 넘어섰다고 생각하지만, 펠레만은 넘을 수 없다.
주제 마시아 페페(1954~1969년 산투스에서 활약하던 왼쪽 윙어)나의 왕, 지구 최고의 선수.다다 마라빌랴(1970년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팀 후보 선수)나는 그와 필드에서 몇 번 대면해 보았는데 내 생각엔 그와 같은 선수는 없다.
테오필로 쿠비야스펠레는 1970년 월드컵에 출전하면서 우승하는 것에 집중했다.
마치 그것이 그의 운명인 것으로 알고 있는것 같았고, 그는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와 같았다.
마리우 아메리쿠(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마사지사)저는 펠레가 최고의 축구 선수라는 제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는 궁극적인 운동 선수였고, 피치위의 절대적 존재였죠. 펠레는 모든 것을 지닌 선수였습니다.
그라운드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쓸고 다녔고, 무브먼트들은 훌륭하였고, 마크맨들을 너무나 쉽게 따돌리곤 했죠. 폭발적 슈팅의 소유자이었지만 공중볼 처리도 수준급이었고 어떤 포즈에 있던 간에 득점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었죠. 음 통산 1283 골이라는 기록만 보고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펠레는 묶어두기가 무척 힘들었고(could not be contained) 17살의 나이에 출전한 1958년 스웨덴 월드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단지 17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브라질 대표로 뛰었고, 그 당시 최고로 꼽히던 팀들과 대전하면서 날아다닌 것이 반증해 주지 않을까요? 예선에서 저는 잉글랜드 대표로서 브라질과의 경기에 출장했지만 다음 경기에 펠레가 출전했었죠. 브라질과 우린 0-0으로 비기고, 골에 목이 말랐던 브라질은 한 번 펠레에게 기회를 주는 모험을 합니다.
그 뒤로 펠레는 뒤돌아 볼 틈없이 승승장구했죠. 저번 달 442에서 호마리우는 자신이 펠레 다음으로 축구사의 2번째로 위대한 선수라고 자평하더군요. 네, 호마리우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전 그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미셸 플라티니, 바비 찰튼, 조지 베스트,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 페렌츠 푸스카스, 존 찰스 등등을 꼽자면요. 제가 생각하는 리스트엔 펠레 뒤로 디에고 마라도나를 No.2로 꼽을 수 있겠고, 호마리우는 아마 20위 안 쯤에 있을 것 같습니다.
바비 롭슨( 2005년 8월호 인터뷰에서)우리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조언을 해주셨다: "앞으로도 누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든, 펠레가 최고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위르겐 클롭하지만 나는 지금의 리오넬 메시보다도 뛰어난 선수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바로 펠레야. 펠레는 피치 위에서 양발을 모두 사용했어. 그는 그의 왼발이 위험한만큼 오른발도 위협적이었지. 그는 공중에서조차 강력했어. 그리고 많은 찬스들을 창조해냈지. 게다가, 그는 정말 상상 이상의 존재야. 어느 날 난 펠레가 골키퍼로 뛰는 것까지 봤어. 글쎄, 난 그걸 보고 '펠레가 원래 골키퍼였나?' 하고 착각했다니까. 그는 그만큼 다재다능해.잔니 리베라펠레는 단순하면서도 완벽한, 축구의 집합체다.
펠레는 메시가 가지지 못한, 피지컬 능력을 가졌다.
그는 들소였다.
그래야 한다면 그는 수비수들을 밀고 들어가서 박살냈다.
펠레는 메시가 가진 것과 동등한 테크닉, 기술, 창의력을 지녔고, 더 힘이 강한 선수기도 했다.
그리고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펠레는 야수가 된다.
그 관점에서 보면 메시는 좀 더 조용하다.
펠레는 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적인 강함이 있었다.
더 어려운 경기일수록, 그는 더욱 위험해졌다.
내 생각에는 아마 이 것이 펠레가 메시보다 우월한 점일 것이다.
펠레가 가장 위대했다.
그는 간단히 말해 결점이 없었다.
피치 밖에서도 그는 항상 웃었고 긍정적이었다.
그가 화난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는 펠레로 사는 걸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세상의 플레이를 하곤 했다.
그 시기(17세)가 진정으로 그가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펠레의 정점은 1970년 월드컵이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은 멕시코 월드컵 비디오를 보고 실망하곤 한다.
내 아들도 그랬는데, 축구에 미친 친구들과 함께 그 경기들을 모두 보고 이렇게 말했다.
"펠레는 정말 뛰어난 선수네요. 그런데 아버지가 묘사하신 만큼의 선수는 아니네요." 하지만 그건 그들이 1958년에서 1964년, 좀더 날씬했던 초기의 펠레를 보지 못했기에 할수있는 말이다.
그 이후에 펠레는 벌크업을 했고, 근육을 키워 더 강해지면서 기술 역시 보존했지만 날렵함을 일부 잃었다.
펠레의 최전성기는 1958년에서 1964년까지였다.
토스탕(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펠레의 파트너) 진지하게 묻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펠레는 세계를 3번 제패했다.
반면 메시가 이룬 건 없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메시가 월드컵을 3번 우승하면 그때 그 질문을 던져 달라.자이르지뉴 (메시와 뎀벨레가 1970년 월드컵 때 자신과 펠레가 세레머니한 것을 재현한 후 펠레와의 비교를 묻는 질문에)한 번은 내가 메시가 특별하다고 말한 적은 있다.
그러나 창의성에서 특별하다고 한 것일 뿐이다.
메시는 특별하지만 인간들 사이에 있다.
펠레는 인간을 넘어섰다.
그에게 단점을 찾을 수 없다.
티테메시는 현세대 최고의 선수지만 마라도나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지전증한 존재이다.
이 전에도 이후에도 마라도나에 비견할 선수는 찾을 수 없다.
마라도나보다 우위에 있는건 펠레겠지. 나는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메시 순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top 10에는 브라질 선수가 두 명 더 있는데, 그건 호마리우와 호나우두이다.
클라우디오 카니자(1990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멤버로 16강전에서 마라도나의 어시를 받고 브라질을 침몰시킨 선수)1위는 펠레, 2위는 마라도나, 3위 크루이프, 4위는 메시 그리고 그와 동급인 디스테파노.알피오 바실레 감독(유일하게 메시와 마라도나를 모두 지도해본 감독으로 최고의 선수를 뽑으라는 질문에) 축구 역사상 3대 영웅은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입니다.
월드컵에서 우승하면 메시도 이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1986, 1990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감독)펠레, 마라도나, 메시는 거의 같은 레벨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펠레는 엄청났고 한 단계 더 위에 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다.
오마르 라로사(1978년 월드컵 우승멤버) 그는 축구 기술이 총집합되어 있는 완벽한 도서관과도 같다.
역대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고, 그 다음은 마라도나와 디스테파노이다.
로베르토 페르푸모펠레는 '왕'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자친토 파케티역사상 최고의 선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펠레와 다른 위대한 선수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펠레는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없던 시절에 전성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미겔 앙헬 브린디시, 펠레와 함께한 아르헨티나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의심의 여지없는 역대 최고의 플레이어. 세계 축구의 상징이다.
펠레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엘리아스 피게로아나는 운이 좋게도 그가 미국 팀에서 뛰고 있을 때 펠레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전에는 텔레비전에서만 그를 보았기 때문에, 실제로 보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경기 동안, 나는 정말 인상 깊은 두 장면을 보았고, 그가 정말 모든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비오 카펠로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다.
로타어 마테우스(2014년 브라질 tv프로그램 캄페앙 쇼에서)나는 펠레와 몇 년 동안 함께 플레이했는데, 그는 수비수였다.
골을 가장 많이 넣는 수비수.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수였다.
또 다른 펠레가 나타나려면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지지메시는 가린샤와 펠레의 수준에 다가가려면 한참 멀었다.
그 두 브라질리언은 내가 살면서 본 축구선수 중 최고였다.
후안 호세 피수티 역사상 최고. 이 이상의 수식어는 그에게 필요 없다.
아데미르 다 기아펠레는 명백하게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선수이다.
그가 생각하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이다.
펠레는 당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드리블을 시작할 것이고 당신이 한 쪽 눈을 깜빡인다면 그새 당신을 제치고 다른 선수 한 명을 추가로 제친 상태일 것이다.
나는 펠레에 근접한 선수조차 보지 못했다.
그는 놀라움 그 자체다.
디노 사니펠레는 피치에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최고의 수비수들이 그를 마킹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언제나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다.
그를 저지하기 위해 두세 명이 달라붙어도 금세 4야드가량 마킹하는 선수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이것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였으며, 나는 그보다 뛰어난 축구선수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산드로 마촐라매우 많은 선수들이 플레이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 패스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펠레의 머릿속에서라면 패스라는 것은 영화가 진행되듯이 흘러가는 일이다.
펠레는 축구를 이해한다.
니우통 산투스펠레는 발명가였다.
비센테 델보스케내가 생각하기에는 펠레가 넘버원이다.
그는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이다.
그는 정말 결점이 없다.
신체적으로 완벽하며, 아주 기술적이고 헤더도 잘한다.
오른발도 잘 쓰고 왼발도 잘 쓴다.
절대 예상할 수 없는 플레이를 펼치며 지능적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에게 있어서 펠레는 언제나 넘버원일 것이다.
네비오 스칼라신체적인 능력과 기술적인 면을 생각해 보면, 펠레는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선수이다.
파올로 로시당신이 최고의 브라질 풀백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펠레라고 답하겠다.
최고의 하프백과 윙어가 누구냐고 묻는다 해도 펠레를 답하겠다.
그는 심지어 우리 스쿼드 안에서 최고의 골키퍼이기도 할 것인데, 그 같은 선수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주앙 사우다냐비교 대상이 되는 선수들의 세대는 각각 다르지만, 각자 이룬 것으로 비교하여 말한다면 펠레가 마라도나&메시보다 위대하다.
내가 플레이를 본 선수 중에는 이 세 명이 가장 뛰어났다.
파울로 포를란펠레와 바비 찰튼이 내가 여지껏 본 선수 중 최고이다.
후안 라몬 베론펠레는 마라도나와 메시보다 완성된 선수이다.
리카르도 보치니 스피드, 가속력, 힘, 폭발력, 헤더, 협응성, 시야, 반응 속도, 경기를 읽는 능력, 왼발, 오른발. 모든 것에 능통했다.
그는 아주 뛰어난 선수다.
역대 최고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펠레는 모든 세대를 통틀어 기술적으로 가장 재능 있는 선수였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첫 번째는 펠레다.
두 번째는 마라도나. 그리고 메시는 마라도나와 동급이다.
안토니오 라틴 (1966 월드컵 때 아르헨티나 주장) 압도적인 클래스와 부러워할 만한 신체 능력의 소유자였다.
사실, 그에게는 아무런 결점이 없었다.
마르첼로 리피당신이 몇 살인지는 상관없는데, 감히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펠레'를 논하지는 마세요.그레이엄 테일러펠레는 천재였다.
엄청난 킥 능력을 양 발에 가지고 있었으며 가슴에 용수철이 있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공을 잘 받았다.
망치로 치는 듯한 헤더 슈팅 능력도 가지고 있었고, 먼 거리에서도 득점했다.
필드 위의 코치였으며 전략가이자 해결사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선수였다.
그러나 공을 가지고 하는 일에서만큼은 마라도나가 더 뛰어났고, 그러므로 기술적인 면에서는 마라도나가 역대 최고라고 본다.
호르헤 발다노바이에른에 살고 있는 나의 오랜 친구들은 모두 펠레의 플레이를 보았고 그가 코스모스와 산투스, 그리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언제나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의 플레이를 좋아했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좀 더 어려운 환경에서 플레이했다.
이탈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마라도나는 나폴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펠레는 나에게 있어 축구의 왕으로 언제나 남아 있으며,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입니다.
로저 밀러펠레와 디스테파노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디스테파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펠레는 모든 것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로헬리오 도밍게스축구의 왕, 가장 위대한 펠레.아베디 펠레그의 축구는 모두를 앞선 것이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다리오 페레이라역대 최고의 선수 세 명? 펠레, 디스테파노, 푸슈카시. 이 순서겠지.알시데스 기지아(2005년 마르카와의 인터뷰에서)나는 40세였던 펠레와 딱 두 경기를 함께 뛴 경험이 있다.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왜 넘버원인지 알 수 있었다.
레오베지우두 주니오르펠레는 축구괴물이다.
히우데라우두 벨리니완벽한 선수. 기술, 시야, 트릭, 신체능력을 겸비했던 유일한 선수이다.
레오나르두 아라우주펠레는 평범한 골을 예술작품으로 바꿀 수 있는 존재였다.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펠레는 닮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던 선수였고, 무엇보다도 점프 능력이 아주 탁월하여 헬리콥터처럼 보였던 선수이다.
나에게 그는 농구선수처럼 보였으며 공중에서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절대 닮을 수 없는 것들이다.
펠레는 완벽한 선수였다.
실비오 마르솔리니마라도나와 펠레 중에서는 펠레가 더 뛰어난 선수였다.
펠레는 사실상 완벽한 선수였다.
양 발과 머리를 사용해서 슈팅을 때릴 수 있었다.
마라도나는 환상적인 곡예사이다.
오른쪽 다리를 거의 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왼발로 하는 플레이들은 헛웃음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마라도나가 양발 사용 능력이 뛰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두 선수 모두 환상적인 선수였다.
카레카그는 가장 완벽한 10번이었다.
그는 완전하게 완벽한 선수였다.
즈보니미르 보반나와 펠레의 차이? 간단하지 않은가? 나는 그저 지나가는 '스타'일 뿐이었고 그는 천재이다.
레오니다스 다시우바그의 눈을 보고 공포를, 아주 심각한 공포감을 느꼈다.
그의 눈은 불타고 있었고, 맹수의 눈과 같았다.
볼프강 오베라트나는 펠레가 50살이 되었을때 그를 상대로 뛰어본 적이 있는데, 그는 여전히 완벽한 플레이어였어. 그는 여전히 축구의 백과사전과도 같았다.
게오르게 하지감히 내가 펠레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왕이다.
지에구 타르델리펠레는 지금의 메시나 호날두보다 뛰어난 선수였다.
주니뉴 파울리스타Q: 펠레를 정의 내린다면?A: Perfect.메시는 그의 시대에서는 최고이나 역사상 최고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두가 있기 때문 입니다.
호나우지뉴Q: 역대 최고의 선수 3명을 말해봐.A: 펠레, 다른 한 명은 에우제비우, 포르투갈인이지. 그리고 우리의 친구 크리스티아누. 또 포르투갈 사람이네! 하하하...Q: 펠레를 1위로 선정한 이유는 뭐지?A: 음, 글쎄... 그는 그의 세대를 대표하는 선수야. 에우제비우도 마찬가지고. 크리스티아누는 현 시점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니까 넣었어.루이스 피구, 리오 퍼디난드와의 1:1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제 생각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지 마라도나, 메시 등을 거론하며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입니다.
그가 훌륭한 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팀에서도 가장 빛났던 것은 펠레였습니다.
빈센트 콤파니나는 낙후된 환경에서도 그런 기적을 일으킨 펠레나 가린샤 같은 1950년대의 스타들이 오늘날의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상상하곤 한다.
반대로 내가 펠레가 쓰던 장비를 쓴다면, 10배는 더 적은 골을 넣었을 것 같다.
분명히.알렉산다르 케르자코프(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을 상대로 골을 넣은 러시아 선수)메시는 2010년대의 펠레이다.
줄리아누 벨레티나의 롤모델은 펠레였다.
나의 아버지는 펠레의 영상을 많이 가지고 계셨고, 나는 그 영상을 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클로드 마켈렐레모든 브라질인에게 있어 펠레는 '세기의 선수'이다.
카푸메시는 아직 펠레나 마라도나의 체급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디디에 드록바펠레는 축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세계에서 펠레는 단 한 명만이 존재한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이런 순위를 누가 만들었는지 묻고 싶군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그 누구도 꺾지 못했습니다.
펠레는 경쟁력 있는 경기들에서 1225골을 넣었고, 그 경기들은 친선경기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펠레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절대로 그만큼 뛰어나게 될수가 없습니다.
사실, 호날두는 절대로 펠레, 마라도나, 메시만큼 잘하질 못할 겁니다.
그들은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들입니다.
호세 알타피니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위대한 선수들이 있을지라도 펠레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페르난도 토레스펠레는 글로벌 맨이자 아이콘이자 모두의 우상이다.
역사상 최고이다.
네이마르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역대 최고의 선수가 펠레라는 말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메시는 정말 위대하다.
하지만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는 더 대단했다.
호나우두펠레 같은 선수는 앞으로 1000년이 지나야 나타날 것이다.
내가 100년이 아니라 1000년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길 바란다.
산도르 코츠시스역대 최고 선수에 대한 논쟁에서 나를 고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펠레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선수는 펠레이며, 마라도나는 마라도나일 뿐이다.
앞으로 메시가 은퇴한다면 어떻게 될까? 메시가 은퇴한 지 10년이 지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마라도나를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메시를 더 자주 보며, 그래서 메시를 위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나와 펠레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다.
나와 펠레는 함께 카타르에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디에고! 디에고!"하며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펠레를 알아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펠레에 대한 호응은 나에 비해서 미적지근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시 현역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플레이만 봤다.
젊은 사람들은 항상 오늘날의 선수를 고평가한다.
그렇기에 시대가 다른 선수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 뛰는 선수와 과거의 선수를 비교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다.
나도, 메시도 역사상 최고는 아니다.
디에고 마라도나다.

 

6. 인성과 사생활 논란

 

축구 황제로서의 자부심이 지나치기 때문인지, 자신과 비교되는 선수들에게는 좋은 소리 안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펠레 자신과의 대척점에 있는 세기의 라이벌인 마라도나와는 서로 디스를 주고 받는 사이이며, 호마리우 및 호나우두 등의 브라질 출신 후배들도 잘 나갈 때는 펠레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리오넬 메시가 그 대상이 돼서 축빠들의 반응은 대개 "안 그래도 그 영감이 최고인거 다 아는데 왜 속좁게 저런 소리를 하지"쯤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메시가 네이마르부터 넘고 오라는 소리는 메시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개드립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을 두고 무조건 닥치고 개최해야 한다며 개최 거부 시위를 비난하면서 엄청나게 욕을 먹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된 호마리우가 월드컵 개최를 놓고 엄청난 비난을 하면서 시위를 옹호하던 것과 비교했을 때 대조적이라서 더 욕을 먹었다.
이 때문인지 아르헨티나 기득권자들에 허구한 날 쓴소리하는 마라도나와 달리 기득권자들에게 아첨하고 빈민층이던 자신의 과거는 잊었다는 비난도 많다.
또한, 가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이 문제는 법정까지 갔는데 펠레가 DNA 검사마저 거부하며 버티자 법원은 딸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딸은 펠레의 성(姓)인 두나시멘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펠레는 이후에도 그 딸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고, 딸이 유방암으로 사망했지만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으며, 그 딸이 낳은 두 외손주들까지 철저히 존재를 부정했고 그들에게 양육비 청구 소송을 당해 패소까지 한다.
의아한 것은 펠레에게 다른 혼외자식 딸이 있었는데 그 때는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7. 어록

 

베토벤이 음악을 위해 태어났고 미켈란젤로가 미술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나는 축구를 위해 태어났다.
축구는 팀플레이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이다.
축구는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이다.
가장 창조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미드필드 라인으로 자주 내려가 미드필더들을 돕곤 했다.
그때는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난 분명히 내가 넣은 골보다도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Q: 당신이 현대에 뛴다면 1,000골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A: 아니다.
현대의 장비는 나의 현역 시절보다 훨씬 발전해 있다.
또한 스타플레이어들에 대한 보호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약 현대에 선수생활을 한다면, 두 배 많은 2,000골을 넣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요즘 비행기에서 직접 자신의 짐을 옮기는 축구선수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이제 축구선수들이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좋은 환경에서 다닐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페널티 킥은 골을 넣는 가장 비겁한 방법이다.
머리는 가슴에게 이야기하고, 가슴은 발에게 이야기한다.
브라질은 축구를 통해 먹고 자고 마신다.
브라질은 축구로 살아간다.
모든 것은 열정에 달렸다.
그것은 팽팽한 기타 줄과 같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며, 항상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나는 축구로서 얻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신께서 나에게 모든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대보다 0.5초 빨라야 한다.
축구를 하는 모든 어린이들은 펠레처럼 되고 싶어한다.
나는 그들에게 축구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줄 책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사람답게 되는지를 보여줄 책임이 있다.
아프리카에 갔을 때, 어딜 가든지 저를 신처럼 받들더군요. 아마도 제가 흑인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줬기 때문인거 같아요. 저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백인의 나라에서 흑인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저는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희미하든지 간에 말이죠.가난에서 어린이를 구해내는 것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는 것보다 기분 좋은 일이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나와 함께 외칩시다.
러브-러브-러브!자신의 은퇴 경기에서현재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의 미래를 만든다.
나이는 상관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배움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누구라도 좋은 선수가 되려면, 무의식 속에서도 양 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축구는 하나의 종교이다.
나는 축구공을 숭배하며, 축구공을 신처럼 다룬다.
많은 선수들은 축구가 그저 공을 차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좀 더 공을 예쁘게 다룰 필요가 있으며 공을 찰 때 귀중한 보석을 대하듯 해야 한다.
사람들은 늘 내게 묻곤 해. "제2의 펠레는 누구죠? 언제 나타납니까?" 사견을 밝히자면 '제2의 펠레'같은 건 태어나지 않을 거야.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공장 문을 닫으셨거든.축구는 한두명의 스타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
늘 경기 안에 어우러져 있어야 하며, 누군가가 소극적으로 군다면 이길 수 없다.
이것은 팀 게임이므로 누구도 혼자 플레이할 수 없다.
11명이 1명처럼 플레이해야 승리가 찾아온다.
나는 가끔 잠을 자지 않고 그저 누워서 궁금해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펠레'가 그리 유명한 이유가 뭘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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